임진왜란 6 - 명량대첩
원균이 조선 수군을 싹 증발시키고 나서 실종되자 조정은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집니다. 이에 선조는 국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아이고 이 장군, 내가 미쳤었네... 한 번만 도와주시게' 하면서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막상 복귀하니 배가 한 척도 없었던 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원균의 패전 이후 왜군 밭이 된 온 전라도를 목숨 걸고 돌면서 병사와 무기를 모으는 눈물 겨운 상황에서 마침내 배설이 끌고 온 13척을 인계받습니다. 하지만 배설은 이미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었고, 배멀미니 몸살이니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덜컥 탈영해 버립니다. 사실 거의 150척이 하룻밤 사이 싸그리 증발했는데 싸우러 나가는 게 두렵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일 겁니다.
그 덕인지 왜군의 자신감은 하늘을 뚫을 듯 올라가 있었는데 정찰대가 조선 수군을 겁내지 않고 쫓아오는가 하면 (이순신이 이에 분노해 못 따라갈 때까지 쫓아갔던 게 함정이긴 합니다) '어? 님들 13척이네요 ㅋㅋㅋㅋ 한 판 붙어보실래요?' 하면서 똑같은 13척으로 덤비기도 했습니다. (웃긴 건 이번에도 이순신은 화나서 쫓아가고 왜군은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적을 2번 격퇴해도 이순신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 수군의 사기는 땅바닥을 기어다니고 왜군은 자기 앞바다처럼 돌아다녔습니다. 오죽했으면 조정에서도 선박 13척 모두 불질러 버리고 수군은 육군으로 재편성하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 때 그 유명한 이순신의 명언이 나옵니다.
- 신에게는 아직 13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힘써 싸운다면 적들도 감히 바다를 넘보지 못 할 것입니다. -
하지만 왜군도 그 놈의 귀신같은 이순신한테 하도 당한 게 많아서인지 작정하고 쓸어버리려 합니다. 133~300척 규모의 대함대를 이끌고 이순신을 찾아 서해를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참고로 현대 대한민국 해군의 전투함을 모두 합해도 약 150척이니 바다를 꽉 메운 적선이란 표현이 크게 과장도 아니었을 듯 합니다. 이순신은 숫적 열세 때문에 넓은 바다에서 싸우는 건 무리라고 판단, 한반도 남서쪽 끝의 진도 앞의 물살이 거센 '울돌목'을 전장으로 삼고 적들을 마주합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사기가 너무 떨어져 있던 터라 모든 리스크를 다 떠 안고 가장 앞장 서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장군이 죽으면 와해되어 버리는 군대의 특성을 생각해 봤을 때 모 아니면 도의 명운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물론, 평소에도 전투에 직접 참가하셨습니다만 이번처럼 제일 앞에 있게 되면 포와 총의 집중 사격을 받아내야만 해서 배로 위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도 조선을 버리려는 것인지 때마침 물살도 그림의 초록색 화살표처럼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침 해가 뜨고 나서 왜군이 자신만만하게 몰려들어오기 시작했고 명량대첩이 시작됩니다. 이순신은 오자병법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격려사를 합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한 명이 길목을 막고 버티어 서면 천 명이 어찌 떨지 않겠느냐?-
부끄럽게도 조선군의 나머지 12척은 수평선 근처까지 멀리 떨어져서
강건너 불구경을 하고 대장선 1척 vs 133척의, 삼국지의 장판파를 해상에서 재현한 전투로써 시작됩니다. 당시 빠른 물살이 의외의 호재로 작용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수많은 배가 좁은 해협의 감당할 수 없는 물살에 휘말리면서 통제력을 상실하고 대장선을 향해 무차별 돌진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울돌목의 유속이 12노트 정도 되는데 카누의 평균 속력이 2~3노트입니다. 조선 노잡이들이 어떻게 버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좁은 해협을 끝까지 사수하고 있었습니다.
전투양상으로 넘어가면, 기본적으로 판옥선이 너무 높아서 일본군은 가져온 갈고리 혹은 판옥선의 튀어나온 틈을 활용해서 기어올라가 싸워야 했는데 조선군이 잡히는 거 다 휘두르고 (승자총통은 초기 형태의 화승총이었는데 이 물건이 휘어진 상태로 발굴되고 있을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을 겁니다) 던지는 걸 받아내며 올라가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세키부네끼리 부딪혀서 엉키고 판옥선을 기어올라가는 동안 날아오는 투사체에 맞아 죽고, 똘똘 뭉쳐 있는 함대에는 빚나갈 걱정 없이 장전되는 족족 포탄 날아오지, 비격진천뢰 날아오지... 어떻게 생각해보면 일본군도 참 불쌍할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한 척이 서서 버티고 수백척 + 매우 빠른 유속으로 미는데도 버티는 이순신은 왜군 입장에서 살아있는 악몽 그 자체였을 겁니다.
복원된 판옥선
그래도 단 한 척, 판옥선 단 한 척으로 어쩔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북치고 징치고 깃발 흔들어대면서 현령 안위를 불러들입니다.
-안위야! 싸우다 죽고 싶으냐! 아니면 네가 도망친다 하여 군법에 죽지 않을 것 같으냐?-
호통을 들은 안위의 함선은 적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갑니다만, 곧 적선에 둘러쌓여 위기에 처합니다. 기록상 전투 중 유일하게 적의 상륙을 허용했는데 (다시 말해 이순신의 배에는 한 명도 못 올라갔습니다) 정황상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대장의 배 옆으로 와서 함께 막는 게 아니라 정면 돌파를 감행해 한가운데로 들어간 듯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긴박한 와중에 이순신은 판옥선으로 세 척을 연달아 완파해서 안위를 구해냅니다. 안위에게 일갈을 날린 직후 호위를 맡기로 되어 있었던 김응함에게도 외칩니다.
-중군(호위장군)이 대장을 지키지 않으니 죄를 면할 길이 없다. 하지만 전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호통을 들으니 김응함도 용기백배하여 전진합니다. 그리고 하늘이 웃음지으시려는 건지 물살이 정반대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조선판 장판파에 이어 제갈공명의 신기까지 부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래그림과 같은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 중입니다.
돌파하기는 커녕 점점 아군이 위기에 몰리는 상황에서 왜적은 결국 오후에 달아나기 시작하였으나 함선소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안 그래도 어려운 회전이 잔뜩 뭉쳐 있는 바람에 더 어려워지고 주변이 온통 섬이라 빠져나가긴 커녕 여기저기 섬에 갔다박아버립니다. 종국에는 말 그대로 잔디깎이처럼 크고 무거운 판옥선 12척에 잡초마냥 쓸려나갑니다.
양측의 기록을 종합하면 일본군은 약 절반의 군사가 전사했고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자신의 안택선(판옥선만큼 덩치가 큰 장군선입니다)과 함께 바다로 가라앉았고, 마다시라는 놈은 죽어서 바다에 둥둥 떠다녔는데 항복한 왜인 준사에 의해서 신원이 밝혀지는 바람에 뱃머리 여신상 마냥 토막나서 판옥선에 전시되었으며장수들이 대부분 중상을 입었고 이순신의 역사적인 패전을 기록하라고 보냈던 모리 다카마사라는 놈은 전투 중 물에 빠졌고 급하게 구조되어 탈출했다고 합니다. 조선은 대개 판옥선이 앞장서고 뒤에 보조선들이 배치된 반면에 왜군은 세키부네가 앞장 서고 안택선이나 특별한 배들이 후방에 배치되었음을 고려하면 처참해도 너무나 처참하게 전방부터 후방까지 모조리 박살났던 것입니다. 한 편, 이 와중에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끝까지 PTSD 증세를 보이며 후방에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명량 대첩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배의 보수와 병사들의 치료, 물자 보급 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후퇴하고 왜군은 명목상 승리를 거두어 꿈에도 염원하던 서해에 진입합니다만... 트라우마 수준으로 이순신에 대한 공포감에 벌벌 떨게 됩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전투도 못 한 채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수군은 말이 수군이지 병사수송선 수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영화 명량에 나왔던 판자나 사다리를 걸치고 달려올라가는 건 고증오류인데 그런 무거운 걸 실을 무게도 아쉽고 (속도가 줄어듭니다) 실어도 판옥선이 너무 높아서 의미가 없기에 애초에 세키부네에는 갈고리만 싣고 다녔습니다.
육지에서는 한창 한양을 향해 진군 중이던 왜군이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듣고는 넋이 나가서 보급로를 찾아 후퇴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도 의심병 말기 환자가 되어버린 선조는 이순신의 공을 깎아내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대장군이 '조선의 왕아. 내가 지금 맘 같아서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축하하고 싶은데 전황이 급해서 못 가는 거니까 헛소리 하지말고 벼슬 올려주게' 라고 훈계하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승진시킵니다. 현령 안위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김억추를 대신해 전라우수사의 자리로 파격승진하게 됩니다.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7급 공무원을 3급으로 파격승진시킨 것 쯤 될 겁니다.
이후 원균의 손에 흩어졌던 수군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어찌저찌 살아남은 판옥선들이 합류하는 데다 진린의 명 수군까지 합류하며 안 그래도 무서운 이순신의 손에 다시 한 번 위력적인 함대가 쥐어집니다. 이에 더해 지상의 조선군과 명군도 사기충천하여 점점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결국 과거의 격언과는 달리, 한 사람의 명장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