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전쟁'에 해당되는 글 1건
- 2017.08.30 :: 전차 (Chariot)
방패와 전열의 발전 이후 고대의 전쟁은 더 이상 개개인의 용맹이나 훈련만으로 승리를 결정짓기는 어려워집니다. 많이 죽여서 이기는 전쟁에서 많이 지켜서 이기는 전쟁으로의 전환이 완벽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 한 부족이나 국가도 남아있었겠지만 기록을 남긴 '문명'국들의 주변에서는 최소한, 거의 정복당해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보니 숫자로 적을 압도해 전쟁을 이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었는데 언제나 숫자로 압도할 수는 없는 법, 인류는 새로운 방법을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으로 전차를 찾아냅니다.
과거의 말들은 크기가 너무 작았고 길들여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타고 다닌다'라는 생각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소나 돼지처럼 먹기 위해서 기르고 수레를 끄는 노동력의 개념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000년 경부터 농경생활을 포기하고 유목을 시작하는 민족들은 이미 생겨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에 의해 말을 탄다는 승마의 개념이 생겨납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문명 세계와의 접촉이 없었습니다만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의해서 북방의 스텝초원에서 중동지방으로 남하하게 됩니다. 하지만 말에 직접 올라탄 채는 아니었고 바퀴가 넷 달린 전차를 타고서였습니다. 전차를 타고온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있을 수 있는데 농사와 유목을 병행하던 민족이라 그럴 수도 있고 승마술이 발전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온가족이 같이 내려가느라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수메르 전차, 대영박물관 소장
결과적으로 북쪽에서 뚝 떨어진 이 선물은 아리아, 히타이트 같은 고대 중동국가들이나 이집트에서 일종의 결전병기로 사용됩니다. 단순 보병들의 힘싸움이었던 전장에 전차를 투입함으로써 커다란 변수역할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다만, 초기 수메르의 경우는 사륜전차를 수송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본격적인 전투병으로서의 활약은 이후 바퀴를 두 개로 줄이는 개량을 한 후에야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한 편, 흔한 인식처럼 보병에 돌격하는 역할은 아니었고 적의 측면이나 후방으로 돌아들어가서 활을 쏘거나 창을 던지는 식으로 견제역할을 했습니다. 그래도 갑옷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인지라 적들은 투사체를 막기 위해 돌아서면 아군이 힘싸움에서 밀리고, 막지 않으면 자기가 맞아죽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훈련이 부족한 군대라면 이미 혼란에 빠져 무너져버렸을 겁니다.
Luxor 신전에 남아있는 Kadesh 전투 기록화 (이집트)
이집트는 속력에 비중을 두기 위해 바퀴축을 전차의 뒷부분에 달았는데, 이런 경우 너무 속력이 빨라지면 전차가 뒤집어지는 문제점이 있었음에도 적을 향해 전력질주를 하는 경우가 없었기에 별로 상관은 없었던 듯 합니다. 반면에 히타이트는 전차가 가지는 충격력의 힘을 알아보고 창병을 3명씩 (마부포함인지 마부제외인지는 불확실) 전차에 싣어 적진에 돌격을 했다보니 안정성을 위해 바퀴축을 가운데에 달았습니다.
전차의 비용은 터무니없이 비쌌습니다. 우선 말이 2~4마리가 필요했고 그 말을 돌볼 사람과 마굿간, 식비가 필요했으며 전문 인부들에게 줄 전차 제작비, 전차 유지보수비에 (이것만으로도 말 한 마리의 가격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전차를 몰 마부까지 포함하면 일반인은 감당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그 위에 올라탈 전투병들의 몸값은 빼고 생각하더라도 말입니다. 특히, 당시 전쟁은 자기 장비는 자기가 챙겨오는 전통이 있던지라 평민은 나무가 많이 들어가는 값싼 창에, 풀이나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방패를 하나 들고오는 게 전부였습니다. 자연스레 전차를 준비하는 것은 왕의 역할이 되었습니다.
이집트, 바빌론, 아시리아 등에서 왕이 전차를 직접 준비하던 것과 달리 히타이트나 중국 일부 국가에서는 왕이 땅이나 세금의 일부를 떼어주는 대신 전차를 신하가 대신 양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봉건제의 시초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을 받은 이들은 전문적인 전투력과 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레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승마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원전 1000년 즈음부터 전차의 시대는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기병이 전차를 상대로 속력이나 선회력 등 여러가지 유리했던 면은 제쳐두고서도 가격부터가 기병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병은 한 기당 말이 한 마리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갈로 대표되는 마구가 개발되고 개량되면서 말을 다루는 난이도가 급격히 낮아지는데, 이는 전차의 시대에 결국 사형선고를 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