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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8.21 :: 임진왜란 2 - 탄금대 전투까지
- 2017.08.21 :: 임진왜란 1 - 전쟁 이전 ~ 시작까지
부산이 순식간에 함락당하고 나자 경상좌병사 이각, 경상우수사 원균을 포함한 온갖 고을의 수령과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적이 온다는 소식만 들려도 모조리 달아납니다. 정부에서는 소식이 닿자마자 이일을 내려보내고 각 고을(도망치지 않은)에서 모인 신병들은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상주에서 그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왜군이 먼저 상주에 도달해 버리자 병사들이 겁에 질려모조리 달아나 버립니다. 바닷길에선 원균에게 왜적에게 나아가 싸우라는 명령이 왔으나 무서워서 무시해버립니다. 겨우 도착한 이일이 약속 장소에 병사가 없어 당황했다가 부랴부랴 수백명을 모아 간이훈련을 시키는 와중에 적의 기습을 받고 이마저도 와해됩니다. 이일은 옷도 다 찢어져 거의 알몸인 채로 신립이 주둔하던 충주로 도망갑니다. 이외에도 왜군이 진군하는 도중 나름대로 병력들이 막아서려 했습니다만은 장군이 먼저 도망가서... 병사들도 뒤따라 도망가는 일이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습니다. 벌떼같은 의병이야기는 아직은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의병 때문에 그나마 왜적들의 진군이 지연되었다.' 라는 서술은 근거가 없는 셈입니다.
정신없이 죄다 도주하는 와중에 명장 신립이 북방전선에서 내려와 한양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읽어보니 이 양반이 힘도 세고 싸움도 잘 하는 건 맞는데 전략적인 식견은 증명되지 않았고,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더러워 군관,병사들이 안 따라가려고 주저하는 것을 유성룡이 지원군으로 쓰려고 모은 이들까지 합쳐서 전부 신립에 딸려보냅니다. 선조도 사활을 걸 생각이었기에 북방의 8000기마대 (전부 정규군으로서, 이 때의 전멸을 기점으로 조선은 영원히 이 정도 숫자의 기병을 회복하지 못 합니다)를 신립에게 딸려보냅니다. 서류상으로는 나름 명장이었던 이일도 합류하면서 당시 조선 기준으로 반드시 이길 최강의 군대가 이렇게 충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명장 신립은 조령(소백산맥의 좁은 길목)을 지켜야 한다고 유성룡, 주변 장군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탄금대의 논밭에 진을 칩니다. 기마대의 특성상 평지가 매우 유리한 것은 맞았습니다만 논,늪지 같은 곳은 말이건 사람이건 땅이 질척해서 거의 기다시피 해야합니다. 최악의 장소에서 적들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한 편, 일본은 조령을 건너기 전에 수차례나 매복이 없나 확인을 했는데 아무도 없자 조선엔 장군이 없다면서 비웃으며 넘어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늪이나 다름없던 탄금대에서 기다리던 신립의 기마대와 일본군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당시 조선은 창자루가 짧아지고 극단적인 궁병 위주의 편제로 갔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1번 글에 언급한 귤강광이 창자루가 짧다고 조롱했던 기록이 남은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 대충 비교를 해놨는데 (쓸저퀄 죄송합니다) 일본의 장창이 4.5~6.5m 이던 것과 비교해서 조선은 장창이 3m 안팎, 그 외의 단창이나 기병용 창들은 1.3~1.6m정도라고 합니다. 일본은 봉건국가라 영주별 생산이었기에 길이 편차가 크고, 조선은 중앙 생산이라 편차가 작습니다. 이러한 길이 차이는 전투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일본은 주력인 조총수들이 장전 하는 동안 창병들이 긴 창으로 일종의 벽을 세워서 적이 접근하지 못 하게 하는 반면에 조선은 활을 주력으로 창병들이 궁병들을 보호하며 싸우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조총의 장전이 제자리에서 숙련자가 2분 이상 걸릴 정도로 정적인 반면에 (창병도 저 긴 것을 들고 가만히 서거나 무릎 꿇고 대기) 활은 장전과 조준에 채 10초가 걸리지 않기에 비교적 동적이었습니다 (창이 무거우면 자리를 자주 옮기기 힘들어지니 짧은 것을 들고 재빠르게 움직임)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에 만능 무기 역할을 차지하던 활과 중세의 만능 무기 조총의 대결이 펼쳐진 전투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후대의 한국내전을 고려해보면 한반도가 무기vs무기를 여러 의미에서 많이 겪었습니다)
무기차이는 길게 설명했는데 전투는 사실 별 게 없습니다. 신립은 여진족을 상대하던 것처럼 돌격 명령을 내렸고 멋지게 달리면서 활을 쏘던 궁기병들은 조총 포화를 뚫지 못 하고 말이 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후퇴명령을 내렸지만 늪이라 후퇴가 느리니 계속 죽어나가고 조총 소리에 말과 군사들이 모두 겁에 질립니다. 거기에 패퇴했으니 이미 사기도 바닥을 쳤습니다. 신립이 안 그래도 조령을 버리고 온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진 군대를 강 뒤편의 언덕에 배치시킵니다. 흔히 말하는 배수진을 친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다 한 것이겠지만 사기가 이미 떨어진 군대가 승리할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전투라고 할만한 것도 없이 거의 학살에 가깝게 조선의 모든 정규군이 탄금대에서 죽어나갔고 신립은 적을 쏘다 죽었다는 말도 있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여기서 전사합니다. 그 와중에 이일은 이 생지옥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합니다.
일각에서는 신립이 서두르느라 일을 망쳤다. 라는 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진군 중이었는데, 이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씩 각개격파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조령과 같은 산맥을 지키고 있다가 협공이라도 당하면 규모가 큰 신립부대의 특성상 보급에 어려움을 겪어 결국 전멸해버릴 것이 명백하니 도주로가 확실한 곳을 전장으로 택했고 말입니다. 물론, 그러면 적을 무시했다라는 뜻이니 여전히 신립을 고평가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당시 전국시대를 거치며 당대의 유럽보다 조총부대의 운용이나 기술 면에서 한 발자국 더 앞섰다는 평가를 받던 일본이 맨날 책이나 읽으며 우리 상국의 위용만 봐도 오랑캐들이 물러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조선을 혼쭐낸 전투였다고 하겠습니다. 전투 이후, 배수진에서 군사가 하나도 빠져나오지 못 해 조선군은 말 그대로 무(無)가 되어버렸고 근처의 충주성도 거의 비워두다시피 했기에 순식간에 함락, 한양까지 허허벌판이 되어버립니다. 그리하여 개전 이후 14일 만에 한양에 적이 도착하는데, 조선이 이 시점에 다급히 지원요청을 하자 첩자가 전해주는 전황을 듣고 있던 명나라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조선이 일본과 협력해 자기한테 공격해오는 줄 알고, 확인을 위한 사신만 몇 명 보내게 되고, 지원군은 늦어지게 됩니다.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 제 2의 국가였기에 이런 의심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선조도 군사가 없으니 장군 하나에게 지휘를 맡겨서 한양을 지키라 한 뒤에 개성을 향해 떠나고, 선조가 떠나자마자 그 장군도 도망가고 백성들은 자기들 지켜준다 그래놓고 도망갔다고 성을 죄다 불질러 버리는 등,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제승방략하려고 한 군데 쌓아놓은 군량미는 결국 죄다 일본군이 배불리 먹는데 쓰였던 건 덤입니다. 당시 조선이 도로망은 또 잘 되어 있어서 한양까지 일본군은 헤매지도 않고 잘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참극의 도중에 선조에게 도착한 전라도의 전령이 "옥포에 정박한 왜군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와 함께 대파하였나이다." 라는 희소식을 전해줍니다.
사진은 현재까지 왜군의 대략적인 진격경로와 격전지입니다.
경상 및 전라 좌,우도를 대략 구분해 보았습니다. 한양에서 봤을 때가(왕) 기준이라 동서쪽과는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책에 잘 없어서 혼란스러우실까봐 발로 그려 넣었습니다 (실제론 점영토라 좀 많이 다릅니다)
내용출처는 유성룡의 징비록,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선조편 등입니다.
그림출처는 N사 블로그, 구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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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글에 제승방략을 도입하고 막장 오브 막장을 향해 분노의 질주 중인 조선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제도의 오류로 인해 무슨 사단이 나는가를 구경해 보아야겠죠...
1510년에는 삼포왜란이, 1555년에는 을묘왜변이 터지면서 조선은 산소호흡기나 겨우 달고 있던 진관 체제를 버리고 제승방략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제도를 큰 전쟁에서 한 번만 적당히 시험해 볼 수 있었어도 참 좋았을텐데 기회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왜구 약간을 제외하고는 왜인들이 유순하게 잘 지냅니다. 그러다가 제승방략제는 유래가 없는 큰 규모의 20만명이 쳐들어온 임진왜란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됩니다.
전시체제가 바뀌건 말건 조선은 언제나 그렇듯 동아시아의 2등으로 명나라랑 같이 사이좋게 놀고 있었는데 1586~7 년 즈음해서 대마도인들이 일본왕 바꼈는데 걔네가 외교하고 싶어해염 하면서 접촉해옵니다. 당시 일본은 대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군주였던 오다 노부나가 가문을 전복시키고(일본사는 잘 몰라서... 나중에 열심히 공부할게요 ㅠㅠ) 자신이 관백의 자리에 오른 상태였는데 상선비국 조선은 반역자들이랑은 외교 안 한다면서... 사신이고 뭐고 다 무시해 버립니다. 기세가 한껏 올라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시당했다고 길길이 날뛰고 조선은 반역자와의 대화는 없다 하면서 긴장이 이어지는 와중, 가운데 낀 대마도만 새우등이 다 터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대마도는 그래도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면서 (귤강광이라고 4가지 없는 놈이 제일 유명하죠) 이 얘기 저 얘기 한 것 같은데, 조선 관리들도 슬슬 조짐이 이상하다는 것과 전운이 감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대마도가 평화의 상징인 공작 한 쌍을 보냈는데 기이한 새라고 조선은 숲에다 버렸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신의 계시였던 것 같습니다 ㄷㄷ;;
그래도 바닷길은 위험하다고 (지도상으론 거리가 얼마 안 되지만 무려 해협이 두 개나 가운데 있습니다. 거친 바다란 뜻이죠) 안 갈려는 거 대마도 사신이 직접 길 안내하겠다고 설득설득을 해서 1590년에 드디어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11월쯤이 되어서야 히데요시랑 면담을 하고 (반란 잡으러 가 있어서 수도에서 기다렸습니다) 다음 해 2월에 조선에 돌아오는데 내용이 아주 가관인 것이... 히데요시 태도가 신하국 사신을 대하는 듯 했고, 왕보고 직접 와서 알현하라 그러고, 사신 알현 중에 자기 애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아주 무시무시를 했다고... 조선인들이 그 태도에 분개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어쨌거나 상사 황윤길(서인)은 "확실히 쳐들어 올겁니다." / 부사 김성일(동인)은 "아뇨 저 미개한 것들이 어찌 건너오겠습니까 껄껄" 식으로 (실제로 저렇게 말했다는 게 아닙니다) 갈라져서 싸웠습니다. 일부 책에서 "당시 우세한 동인의 의견에 따라 황윤길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라고 서술하는 듯 하던데 실제로는 유성룡이 '성일아, 그거 틀리면 알지?' 하니까 김성일이 바로 '아니 그게 아니고, 혼란을 방지하고자...' 로 주장을 굽히면서 조선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명나라는 일본의 수상한 낌새를 이미 눈치 채고 조선측에서 연락이 없자, 조선이 같이 침공해 오는 거 아니냐고 내부적으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일본에 통신사 보내는 문제로 늦게나마 사신이 명나라에 당도하면서 그 의심은 일단락됩니다.
이 양반들이 책쟁이지만은 그래도 나름 머리는 잘 돌아가서 남동쪽 해안에 최강의 장군 하나 파견하려고 왕과 신하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는데, (결과론적으로 임진왜란이 터진 시기를 고려해보면) 관찰사가 가서 군량이라든지 병사들을 점검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한 채로 이각이 임명되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급하게 임명되어 그랬는지 능력치가 영;;; 거시기했습니다) 그 후, 성 점검을 하면서 성벽,해자 보수도 하고 새로 벽도 쌓고 하는데 농민,아전,양반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평화 시에 뭔 짓거리냐고 제대로 협력을 안 합니다. 그래도 선조가 이 때까지는 어릴 때 평가 그대로 '총명하고 지혜로운' 왕이었던지라 이순신, 유성룡, 신립 등(평가 좋고 성과 있는)의 직위를 신하들이 반대하는 것을 무시하고 하던 대로 (예전부터 전쟁 날까봐 불안하다고 이런 식의 인사를 했습니다) 급속 승진을 시켜줍니다. (덕분에 이순신의 전설이 나올 판은 마련되었으니 선조도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은 있었습니다.) 아무튼 조선이 나름의 준비를 하는 동안 2년간 3번에 걸쳐 흰 무지개가 햇무리를 거쳐 해를 꿰뚫었고 (흰 무지개 - 다양한 색이 하나로, 통일된 일본 / 햇무리 - 태양을 감쌈, 조선 / 해 - 천신, 명나라) 선조의 처소에 괴짐승이 나타나는가 하면 숲에서 오색조가 날아다니는 등 여러모로 괴이한 징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1592년 4월에는 일본인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사라지더니 13일에 일본군이 부산진에 상륙합니다. 부산진의 조선군은 최선을 다해 대비를 했었습니다만 평소의 수십~수백명이 아닌 뜬금없는 20만 가까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수백명의 경비대 수준이었던 정발과 부산진 군사들이 몇 시간 버텨내지도 못 하고 전멸합니다.
뒤이어 벌어진 동래성 전투에서 부사 송상현은 악착같이 어금니 물고 버텨보았습니다만 기어이 왜군들이 성벽을 넘었고, 관청에서
업무복으로 갈아입은 뒤 정자세로 앉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왜군도 감동해서 송상현의 시신은
잘 묻어주고 묘비도 하나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육전에서 이런 멋진 영웅들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초반부의 영웅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ㅁ-;;
내용출처는 유성룡의 징비록, 조선왕조실록:선조편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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