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양 고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12.13 :: 테르모필라이 전투 (Battle of Thermopylae)
  2. 2017.11.08 :: 팔랑크스 (Phalanx)
  3. 2017.09.06 :: 스파르타식 교육 아고개 (Agōgē)
역사/서양 고대 2017. 12. 13. 17:27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아마 많은 분들이 전투가 일어난 테르모필라이보다는 영화 300으로 더 잘 알고 계실 전투입니다.


이 전투가 일어나기 약 15년 전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홧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1세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내부(중앙집권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땅이 너무 넓어서 심심하면 터졌습니다)의 반란을 정리하고 그리스 놈들한테 복수하려고 이를 바득바득 갑니다. 그래서 본토에 대한 경고장 느낌으로 소아시아 (오늘의 터키) 서해안의 그리스 식민지들을 모조리 쓸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리스 전역의 각국에 사절을 보냅니다. 이것이 유명한 '물과 흙을 바치면 평화롭게 공존할 것이다.' 라는 문구입니다. 문명의 최전선이라 불리던 마케도니아마저 굴복시킨 페르시아의 이 요구는 절반 이상의 그리스 도시들에 의해 받아들여집니다. 마라톤 전투 이후로 그리스 주도국으로 군림하던 아테네는 완전히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도 항복하자니 체면이 안 서고 저 놈 저거 또 오면 막아낼 자신은 없거든요. 이렇게 고민하던 그 때, 스파르타에서 멋있는 행동을 선수 쳐버립니다. 사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을 뎅강하고 잘라버린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신을 죽이는 건 극도로 무례한 행위라 그냥 '뜨자'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테네도 덩달아 사신을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기타 힘 좀 있다 싶은 도시들도 주도권을 잡을 마지막 찬스라는 생각에 사신을 그냥 보냅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사신들로부터 소식을 듣고 살생부를 작성합니다. 특히, 스파르타는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남기고 모조리 죽이고 노예로 팔아주겠다고 단단히 벼르죠. 이렇게 서방 역사상 첫 백만대군이 출발합니다. (실제로는 30~60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당시엔 보스포루스 다리가 없어서 해협을 배로 건너야 했는데, 통 큰 크세르크세스는 배를 연결해서 물에 뜨는 다리를 제작합니다. 그리고는 해안선을 따라서 아테네를 향해 직진하죠. 그렇게 페르시아 -> 마케도니아 -> 항복한 그리스국가들을 거쳐 남부로 들어가는 길목인 테르모필라이에 진입하게 됩니다. (해군도 보급을 위해 해안선을 따라서 함께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곳에서 그리스군과 조우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를 필두로 약 7천명의 그리스인이 모인 이 연합군은 '여기 뚫리면 끝장이다.'라는 생각 하나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검은색 빗금은 대략적인 오늘날 간척지를 표시해둔 것인데, 당시에 정확히 어느 정도 너비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원지도 출처 : Google Maps)


실제로 지도에 나와있듯이 길목이 매우 좁았고 바로 옆에 섬이 하나 있어서 바닷길도 상당히 좁았습니다. (옛날엔 나침반, 정교한 지도 같은 게 없어서 현대 지도로 짧고 뭐고 간에 주변에 땅 안 보이기 시작하면 선원들이 겁에 질렸습니다 그러다보니 땅 근처에서 항해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300명이 보내진 걸로 알려졌는데 왕실 근위대의 수와 일치하고, 이는 몰살을 각오하고 레오니다스와 근위대만 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병력을 다 내보냈다가는 노예 민족인 헬롯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싸움부분에 들어가기 전에 짧게 고대 전쟁을 설명하자면, 당시는 머릿수로 밀어붙여서 적이 도망치면 이기는 게 전쟁이었습니다. 다만 그리스와 페르시아 군인의 차이점은 // 그리스는 돈 좀 있는 '시민'이 자기 돈으로 장비 왕창 사서 훈련도 빵빵하게 받은 뒤에 팔랑크스라고 불리는 방패와 방패를 맞닿고 가만히 서서 앞으로 걸어나가는 전술을 취했고 // 페르시아는 나라에서 농민들을 왕창 모아다가 창 한 자루 씩만 쥐어주고 방패나 갑옷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기에 나뭇가지를 엮은 방패와 평소 입던 옷을 챙겨서 전장에 우루루 몰려나갔습니다. 다시 말해, 질 vs 양의 대결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그리스 창에는 페르시아 방패와 갑옷이 다 뚫리고 페르시아 창,화살에는 그리스 방패는 커녕 갑옷의 얇은 부분도 안 뚫려서 전투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안 그래도 방패의 벽, 팔랑크스에 막혀서 찌를 만한 데도 별로 없는데 틈새 부분은 죄다 갑옷으로 덮여있으니 속수무책이었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모탈이라고 불리던 중보병도 투입했는데, 영화처럼 얼굴에서 입김 뿜고 그런 부대였으면 혹시 몰랐겠지만 아니었기에 이들의 장비로도 감당이 안 됐습니다.렇게 장비와 훈련으로 다져진 그리스 군은 이틀 간은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바다에서는 오히려 당시 아테네가 바다의 왕자라 다 이기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3일 째에 에피알테스라는 배신자가 (이 인간 하나 때문에 집안 전체가 그리스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배신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큰 돈을 받고 비밀 통로를 알려줍니다. 이 쪽으로 2만 명의 별동대가 오니까 (이틀간 죽어나갔는데도 별동대 숫자가 그리스군보다 3배 많은 건 넘어갑시다) 여길 지키던 소수의 그리스군이 숫자에 기겁해서 도망쳐 옵니다. 총사령관 레오니다스는 회의를 열고 일부가 시간을 끄는 동안 나머지 군대는 후퇴해서 정비하자는 안을 냅니다. (지금 모인 병력이 대부분의 정규병력이라 여기서 잃을 수 없었습니다)



(출처 : Pinterest)


회의 후, 스파르타300, 테스피아700, 테베400인 만이 남아서 페르시아의 발목을 붙들고 마지막까지 싸웁니다. 하지만 위의 사진에 나와있듯이 팔랑크스는 오직 정면의 적과 싸우는 데에 특화되어 있어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페르시아 군 손에 하나 둘씩 죽어나갑니다. 전투가 한창일 때 레오니다스는 결국 전사했으나 스파르타인들이 '왕을 지켜라' 라고 일제히 외치면서 그 절망적인 와중에 시체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날이 가기 전에 1400명은 전멸했고 페르시아는 계속해서 남하합니다. 영화나 현실이나 엄청나게 극적이고 멋있지만, 실제론 3일 만에 방어선이 뚫려버렸으니 페르시아가 병력 피해를 조금 더 봤을 뿐 그리스의 대패였습니다.

 

하지만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을 걸 알면서 싸우러 나간다는 이 행위는 이후 2500년간 전세계 사람들의, 농담삼아 국뽕용 향신료로 쓰여왔고 아직도 스파르타의 전사들을 역사상 가장 용맹한 군인 가운데 하나로 기억하게 했습니다. 비록 패배했을지라도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이 때 아테네는 패배 소식을 듣고, 도시를 비우고 펠로폰네소스로 시민들을 대피시키는데 페르시아군이 아주 신나게 잘 약탈했습니다.


여담으로 사실 일부가 테르모필라이에서 살아남긴 했으며 스파르타인도 3명이 살아남았습니다. 에우리투스, 아리스토데무스, 판티테스가 그들의 이름입니다. 그 중 에우리투스와 아리스토데무스는 전투 전에 눈병에 걸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후방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에우리투스는 고집을 부려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데무스는 평생을 겁쟁이라고 국민 전체에게 멸시를 당했으며, 전장에서 싸우다 죽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합니다.


판티테스는 레오니다스의 명으로 잠시 테살리에 파발로 갔다가 제 시간에 전장에 돌아가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판티테스도 겁쟁이라고 멸시했으며 그는 목 매달아 자살했다고 합니다. 슬픈 의미에서는 결국 300명이 모조리 죽은 것이 맞는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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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루나이
:
역사/서양 고대 2017. 11. 8. 16:59


팔랑크스는 고대 그리스나 마케도니아에서 사용되었던 진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단은 진법에 앞서서 그리스 군인들이 입었던 장비에 대해 알아야 할 텐데요. 위의 사진에 나와있는 나무방패(+청동조금), 청동갑옷(풀셋은 파노플리라고 부릅니다) + 두 번째 사진의 창(도리or도루)가 규격 장비였습니다. 다만, 어깨와 팔뚝 갑옷, 허벅지와 발목 갑옷은 비용 문제로 매우 드물었습니다. 또한 나라마다 국가에서 장비를 지급하는 경우와 개인이 구매해서 충당하는 경우로 달랐는데 스파르타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유지보수까지 모두 개인이 충당하게 했습니다. 돈 문제 때문에 자연스럽게 당시 군인은 시민+중산층 이상이라는 조건이 붙는 일종의 명예직이 되었습니다. (이기면 약탈이 허용되었으니 오직 명예만 보고 참가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여담으로 말은 나중에 다루겠지만 외제차 가격이었습니다. 때문에 '고대 전쟁에서 말이 있다 = 귀족' 으로 봐도 대부분 무방합니다.



장비에 대한 설명을 조금 붙이자면 방패의 이름은 호플론이었고(여기서 호플리테스라는 중보병의 명칭이 등장합니다) 크기는 1M 정도였지만 당시의 작은 신장을 고려하면 얼굴~무릎까지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창은 도루라고 불렸는데 꼬리 부분에 사우로테르라는 이름의 찌를 수 있는 날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용도는 바닥에 꽂고, 오른팔 좀 쉬거나 뒤로 안 밀리게 버티는 것, 밀고 나가면서 쓰러져 있는 적의 확인 사살, 앞부분이 부러졌을 때의 보조 무기 정도였습니다. 칼은 크시포스라고 불렸으며 오늘날 주방에 있는 식칼 정도 길이에서 그 2~3배 정도까지 국가별로 다양했습니다. 애초에 이걸 쓰는 상황이면 진형이 무너졌다는 것이고, 그 뜻은 완패 혹은 완승이라 쓸 일은 별로 없었을 테지만요. 이전 문단에 돈 문제라고 언급했지만, 허벅지나 팔 쪽의 갑옷을 입지 않았던 또다른 이유는 방패로 막히는 데 굳이 그 비용을 들여봐야 사실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 아무튼 이런 장비를 갖춘 호플리테스들이 훈련을 받고 나면 위의 그림과 같은 멋진 팔랑크스진을 짤 수 있었습니다. 고증화라서 약간 왜곡이 있는데, 실제로는 뒷줄에서 방패를 왼쪽으로 든 게 아니라 앞으로 들고 동료를 밀어줬습니다.



영화 300이 이거 하나만큼은 그래도 꽤 열심히 고증을 했습니다. 방패가 눈에 띄고 판도 넓고 하니까 군인들이 각자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애초에 자기가 사는 거니까 튜닝 정도는 너무 어긋나지만 않으면 다 허용해줬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나라에서 공장식 생산으로 같은 것만 찍어냈습니다. 이렇게 같은 것만 찍어낸 공장식 생산이 효과를 본 게 역V자 마크가 그리스 알파벳으로 L인데 이것이 스파르타의 국명 Lakedaemon의 첫 글자라서 보기만 해도 적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기도 했다네요.


방패는 상당히 혁신적이었습니다. 왼팔을 가죽 끈 사이로 끼워넣고 끝 부분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들게 되어 있어 잘 놓치지 않는 설계인 데다가 그릇처럼 볼록해서 왼쪽 어깨에 건 채로 다녔다고 합니다. 무게가 7~10KG이상 이라고 하니 손으로만 들면 몇 분 싸우지도 못 했을 겁니다. 그런데 왼쪽 어깨에 건다는 부분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방패가 원형이다 보니 나의 왼쪽 절반, 동료의 오른쪽 절반을 가리게 되는데 (위는 투구와 갑옷이 가려주고 아래는 사람이 너무 빽빽해서 찌를 정도로 팔을 뻗을 수가 없었습니다) 왼쪽에서부터 가려주면서 차근차근 정렬하면 그럼 가장 오른쪽 사람은? , 그대로 몸을 드러낸 채로 싸웠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팔랑크스의 가장 오른쪽 줄은 그 나라에서 가장 잘 싸우고 오래 살아남은 베테랑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반면에 왼쪽은 몸이 완전히 가려지니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로 채웠구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숙련도의 차이 때문에 실제로는 오른쪽이 전투를 리드했습니다. 베테랑은 창을 창으로 막고 찌르고를 하는데 신병들은 방패 뒤로 숨기에 급급해서 서로 오른쪽이 왼쪽을 점점 밀어내는 형태로 갔다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일부 줄이 무너져 도망치면 그 균열에서부터 주변이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앞이 비게 된 부대가 적의 측면을 후려쳐서 전체를 무너뜨렸습니다. 위의 그림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오늘날의 인식과 다른 점은, 갑옷이 튼튼하고 애초에 줄다리기랑 비슷한 원리로 싸우는 거라 패배해도 큰 피해가 없어서 다시 덤비고 다시 덤비고 하는 게 이론적으론 가능했습니다. 물론 이미 졌던 기억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나서 점점 더 빨리 무너졌을 겁니다.

 

실제 전쟁을 상상해 보시면 대략 감이 오시겠지만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 체력전이었습니다. 부딪힌 사람들끼리 서로 방패로 밀고, 뒤에서도 밀리지 않으려고 앞사람 갑옷에 대고 방패로 밀고, 옆과 이어진 방패의 벽이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에 서로 악착같이 줄도 지키면서, 그 와중에 오른팔 들어서 창으로 찌르고, 방패 나무부분에 꽂히거나 부러지면 손목을 돌려서 뒷부분으로 다시 찌르고, 그것도 없어지면 뒷줄에서 창 받아서 찌르고 (창길이가 2.5M라 앞의 두 줄만 공격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수염이랑 머리채 잡아당기고, 저~ 뒤에선 돌 주워서 던지고 했답니다.


결론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 덩어리식 전술이었고 가장 약한 줄이 곧 그 군대의 실질적인 힘이었기에 훈련의 강도가 다른 국가에 비해 매우 빡셀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위의 노란색 그림의 제일 뒤에 나팔을 불고 있는 사람은 일종의 지휘관인데 제대로 밀고 있는지 확인하고, 격려하고, 도망 못 가게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결국 아무리 훈련을 해도 전장에선 도망가는 사람이 나왔다는 뜻이겠죠.

 

실제 전장에서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증명되었듯이 장비가 차이나는 군대와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했으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보조 병력과의 조합도 완성됩니다 // 전후방엔 투창병과 궁수 - 전방에서 몇 차례 사격 후 팔랑크스의 뒤로 돌아가 후방에서 지원사격, 중앙엔 팔랑크스, 양 날개에 기마대


그러나 오직 전진만을 위한 보병의 장비, 훈련 때문에 측면과 후방이 치명적으로 약하다는 단점을 보완해주던 기마대와 보조 부대가, 이후 비용 문제로 점차 축소되면서 서방에서 불세출의 명장 한니발에게 뿌리 깊은 영감을 받은 로마군에 의해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싸울 수 있다는 이 진형의 원리 자체는 근대에 기관총이 개발되기 직전까지 오랜시간 이어집니다.

  


출처는 제 상상, 구글링, 영문위키, 플루타르크 영웅전입니다.




posted by 미루나이
:
역사/서양 고대 2017. 9. 6. 00:12

스파르타에선 왕의 공식 후계자가 될 아이 둘을 제외하고 모든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아고개라고 불리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스파르타인들의 전설적인 영웅왕 리쿠르고스가 남긴 제도였습니다. 교육은 대략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에 나눠서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의 멘토, 멘티처럼 성인 남성 한 명이 여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원로들의 검사를 통과한 아이들인데, 흔히들 떠올리는 산에서 떨어뜨려서 살아남는지 지켜보는... 건 아니고 아기를 대충 보고 체중이랑 혈색이 좋다 싶으면 합격이었습니다. 불합격은 산에서 굶겨서... 살아남으면 통과시켰습니다.

 

아무튼 훈련이 시작되면 시시티아(Syssitia)라고 불리는 집단 숙소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았으며 집은 가끔 잠이나 자는 곳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생도들은 1년에 한 차례 푀니키스(Phoinikis)라고 불리는 빨간 망토를 하나씩 받았고 그 외의 옷은 일절 금지되었습니다. (영화 300에 나오는 붉은 망토입니다) 침대는 갈대를 맨손으로 뽑아서 직접 엮어 만들었으며 식사는 항상 적게 주고 훔쳐먹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도둑질이 들키면 처벌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이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한 가정집에서 키우던 여우새끼를 훔치려 했다는 이유로 한 학생을 붙잡고 어디에 숨겼는지 말하라고 계속 매질을 했는데 아무리 맞아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포기해서 가라고 하니 소년이 픽 쓰러졌는데 배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망토로 가리고 있던 배를 들춰보니 여우새끼가 소년의 배를 손톱으로 갉아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헬롯(Helot)이라고 불리는 노예민족이 라케다이몬(Lakedaimon, 스파르타 도시 이름) 근처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사람을 죽이는 감각을 익히고 노예들의 반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주기적으로 축제삼아 그들을 학살하는 것도 실습했습니다.


추가로, 약간 우습게 표현해서, 감정도 없는지 학생들이 말 많이 하면 싸다구, 의미 없는 말 해도 싸다구, 농담해도 싸다구를 갈겨서 말을 적게 하는 기계 같이 키웠습니다. 자기 감정을 철저히 숨기도록 했던 것입니다. 덕분에 실제 전쟁에선 겁에 질리지도 않고 굶어도 사기가 떨어지지 않으며 국가를 위해 죽는 걸 기쁘게 여기는 일당백의 군인들이 되었습니다. 스파르타식 교육이나 그들의 전설적인 군대가 아직까지도 명성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분량이 적어서 이 글에 스파르타 여자들에 관해서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여자들도 머리카락을 짧게 깎도록 했습니다. 남자들이 유혹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닌 다른 집 남자들과 잠자리를 갖는 것이 권장되었습니다. 다양한 남자들과의 관계로 더욱 건강한 아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공식적으로 시민 취급을 받지는 못 했기에 아고개에 참여하진 않았습니다만 남자들과 함께 '같은 강도'의 운동을 하기도 하고 자기네들끼리도 알아서 몸을 단련하는 등 이쪽도 강한 걸로 따지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스파르타 남자는 스파르타의 어머니들만 낳을 수 있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스파르타 여자들은 페플로스(Peplos)라는 옷을 입었는데 치파오처럼 양 허벅지가 파여있어서 타국의 그리스인들이 이걸 보고 허벅지 노출녀들이라고 놀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자들 또한 전쟁을 되게 좋아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 설에 따르면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여자들은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머리도 기를 수 있고 옷도 좀 다르게 입어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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