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조선 2017. 10. 11. 12:37



왜군은 다시 한 번 기세 좋게 아랫지도의 노란 길을 따라 밀고 올라갑니다. 전라도 교통의 요지인 남원성을 뚫고 전라도를 휩쓸고 다니면서 지금의 천안인 직산까지 쾌속 진격합니다. 호남평야의 입구로, 곡창지대의 관문이라 불리던 전주성의 수비병력은 어김없이 죄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명군의 활약으로 한양을 앞둔 최후의 길목인 직산에서 왜군은 발목이 잡히고 맙니다. 이제 겨울은 다가오고 은은히 풍겨오는 명량의 바닷내음에... (왜군 입장에선 그놈의 이순신이겠죠) 때마침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왜군은 이대로는 살아서 못 나가겠다 싶어서 왔던 길 그대로 재빨리 되돌아 나갑니다.

부랴부랴 항구에 도착해서 배타고 나가려니까 또 그놈의 이순신이 전라남도 순천왜성에 주둔 중이던 고니시를 개박살냈다는 비보를 접합니다. 당시 항해술로 순천에서 일본으로 대규모 함대가 직항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부산 - 대마도 - 일본 루트를 거쳐야 했기에, 고니시를 구하려고 부산으로부터 약 500척의 함선에 60,000여 명의 병력이 순천항으로 서둘러 달려갑니다. 이순신은 노란 x가 된 곳 근처에 명군을 숨겨두고 그들을 슬쩍 보내줬습니다. 그러다 여수 오른쪽의 좁은 곳으로 왜 수군이 들어오자마자 앞길을 막고는 대포알을 종류별로 대접합니다. 그 놈의 이순신.. 그 놈의 이순신!!! 하며 왜군은 이순신의 대장선 (어떻게 알아보았냐하면 동서양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가장 크고 화려한 배에 대장이 탔습니다) 에만 집중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추가로 조선군의 뒤에선 고니시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고, 왜군의 뒤에선 명군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치며 바다 위에 온갖 군함들이 엉겨붙어 난전을 새벽부터 수시간동안 이어갑니다. 200척 가까이가 완파되고 그와 비슷한 수가 더 이상 배로 기능할 수 없게 된 왜군은 약 150척만이 살아남아서 부산쪽인, 명군이 있는 방향을 악착같이 뚫고 도주합니다. 그걸 또 그 놈의, 그 놈의 이순신이 뒤쫓아오면서 하나 둘씩 계속 까부숴 버렸습니다. 결국 점심 때까지 이어진 추격전에서 10%도 안 되는 약 50척 만이 무사히 노량을 빠져나갔으며 조명 연합군은 100척 이상의 적선을 나포하고 근 400척 가까이를 격파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명 수군 제독 진린이 기뻐하며 이순신의 대장선에 뛰어올랐을 때, 장군은 이미 방패의 벽 안에서 '전투가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이 사실을 안 진린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주저 앉아서는 목 놓아 통곡했다고 합니다. ㅠ.ㅠ 일반 병사들이 울고불고 한 것은 이루말할 것도 없었죠. 심지어는 '장군님마저 가시면 이제 저희는 누가 지켜주신단 말입니까!' 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이게 왕보다 장군을 우선하는 뉘앙스라 까딱하면 목 잘리는 대사입니다. 그 정도로 큰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뜻이겠지만요.

진린이란 장수를 간략히 소개하고 넘어가자면 공적과 재물을 탐하고 능력은 그리 우수하지 않았던 자인지라 (명나라판 원균 떠올리시면 쉬울 듯 합니다) 이순신을 처음엔 시샘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왜적을 잡아놓고 그걸 명 수군의 공으로 보고하고, 선물도 주고 하니 완전히 사생팬으로 변해선 하자는 건 다 하고 명령도 척척 잘 듣는 좋은 장군이 되었습니다. -ㅅ- 아무튼 흔히들 말하는 자기 배 부른 것 밖에 모르는 무능력이가 싸움에 열심히 참가하고, 공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 것을 보면 이순신이 사람 다루는 데도 참 대단했습니다.

이순신의 추격까지 더해지며 잃은 함선과 병력의 손실이 너무 컸던 탓인지 통일 일본은 다시는 조선을 침공할 엄두조차 못 냅니다. 아니. 멸망해버립니다. 말이 통일이지 히데요시 주도의 연합국가 개념이었는데 히데요시의 병력이 거의 몰살당해버렸으니 어쩌면 당연했을 겁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뤄보겠습니다.


그러나 조선 국토는 30%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황폐화되어 버렸으며 굶어 죽는 이가 속출하고 산 속에 숨어버린 자도 셀 수가 없는 지경이라 인구는 거의 절반 수준으로 추락해버렸습니다. 이어진 병자호란으로 치명상을 입은 조선은 동아시아의 강국에서 고래 사이의 등 터지는 새우로 빠르게 쇠퇴합니다. 일본은 이 시기 약탈 + 장인 납치 + 조선통신사 등등으로 중세 문화가 활짝 꽃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어받은 통일 왕국은 황금기를 구가합니다.

다들 잘 아시듯이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관해서는 의문이 꽤 있는 편인데 한산도에서 일점사를 그렇게 당해도 안 돌아가시던 분이 덜컥 추격 중에 돌아가셨으니 그런 의혹이 나올 만도 합니다. 유언만 겨우 남기고 사람이 즉사할 정도로 당시 해전에서 치명적인 총탄을 맞기가 매우 어려웠기도 하고요. 유명한 음모론 대로, 당시 조선 수군이 조총을 다량 확보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바로 옆의 군관에게 자신을 쏘아달라고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역사에 드물 정도로 나라를 끔찍이 사랑하신 분이셨으니 자신의 존재가 조선 왕조에 심대한 위협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당시 선조의 정통성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는 커녕 도망다니기 급급하고, 백성들에겐 성에 함께 남겠다고 공언하고서 혼자 빠져나가는 등 신뢰도가 아주 밑바닥인 데 반해서 이순신, 권율, 곽재우 등의 전설적인 영웅담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감지한 것인지 평양에서 한 때, 명나라의 실질적인 변방국이 되고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라는 천자의 명에 승낙의 뜻을 전하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심유경의 허풍외교 때문에 전쟁이 재개되면서 다행히도 무산되었는데 하마터면 300년 일찍 나라가 망할 뻔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후로 인간 불신적인 경향을 많이 보여줍니다. 유성룡도 강등시키고 이순신도 파직시키고 주변의 누구든 일단 의심해 버립니다. 심신이 하도 시달려서 어느 정도 안정기에 돌입하자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후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을 지지하던 유성룡은 유배되어 죽었고 이순신도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물론, 자신을 지지하던 기반은 선조에 의해 거의 초토화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선조의 책임이라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선대의 삽질이 유의미하게 영향을 끼쳤음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해신 이순신과 천리안 유성룡이 죽고 애국충정의 여러 의병장들도 헛되이 죽었으며 어린 시절 총명했던 선조는 의심병에 걸렸고 국토도 백성도 죄다 불타버린 슬픈 전쟁 임진왜란이었습니다.

posted by 미루나이
:
역사/조선 2017. 10. 6. 14:13



때는 임진왜란 개전 초기, 부산 - 상주 - 탄금대에 이르는 방어선이 죄다 붕괴되고 한양까지 적이 들이닥치자 선조는 고민 끝에 평양으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적의 기세는 누그러들지를 않고 명의 원군도 언제 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조는 튼튼한 요새와 군사들이 있는 함경도 끝의 6진으로 도망가고자 합니다. 지도에 잘 보이실 지 모르겠지만 길이 멀기도 하고 험하기도 해서 피난지로는 적절했습니다. 그 때, 유성룡이 그걸 막아섭니다. 만약 거기까지도 왜적이 쫓아오면 야만인의 땅으로 피난을 가야 하는데, 그 위험한 길로 왕을 보낼 수도 없을 뿐더러 야만인에게 의탁하면 양반들이 뭐라 그러겠어요... 다시 말해, 여진족의 땅으로 넘어가는 순간 조선 왕조의 정통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선조는 마음을 돌려 명나라와 인접한 의주를 향해 피난을 갑니다. 선조의 왕비와 서열이 낮은 왕자는 6진으로 보냈습니다. 다행인지 위기인지, 한양 혹은 강원도에서부터 출발한 왜군에게 6진의 왕족들이 죄다 인질로 잡혀갑니다. 유성룡의 혜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무튼 의주로 가는 길에 펼쳐진 평야 지대의 곡식들이 각 고을의 관청에 쌓여 있었고, 일행은 간만에 배불리 먹으며 의주에 도착합니다.

 

한 편, 유성룡이 가는 길에 소를 어디선가 끌고 온 백성이 있어 고문을 해봤더니 왜군의 밀정이었습니다. (ㄷㄷ;; 여러모로 감각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때는 평양성까지 함락당한 상태였는데 붙잡은 밀정 덕분에 그 때나마 지역 곳곳의 조선인 첩자를 싹 색출해서 눈에 잘 띄는 시장에 목 매달아 버립니다. 때문에 의주까지 치고 올라오려던 왜군은 정보가 갑작스레 끊겨버렸고 명군이 이미 왔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급제동이 걸려버렵니다. (당시 명군이라는 존재는 지금의 미군보다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명의 사신 심유경이 슬그머니 혼자 와서는 "이보시게. 우리 명의 백만대군이 오고 있는데 맞설테요? 적당히 조공도 바치고 하면은 우리가 또 섭섭치 않게 대해줄 것인디..?" 하니까 회의하느라 성 안에 틀어박혀 버립니다. 여담으로 조선군이 쓰려고 모아놓은 식량이 평양성에 굉장히 많았는데 그 덕분인지 한동안 약탈도 하지 않았던 듯 합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던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손에 평양성을 빼앗기지만 벽제관에서는 명군을 막아내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집니다.

 

벽제관에서 왜군이 승리하면서 명군과 함께 한양을 협공하려던 권율은 행주 산성에서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바로 왼쪽에 한강이 흐르고 있어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절호의 기회에 각개격파를 노리고 공격해 온 왜군을 권율이 막아버렸습니다! 행주 산성은 상당히 조그마한 토성인데 평시엔 안 쓰고 위기시에 쓰는 성이라 관리도 안 되고, 안에 물자도 없고, 백성들도 살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조선군이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덜컥 이겨버린 것입니다. 번외로 행주치마 설화가 있습니다만은 성의 규모나 종류상 아무래도 허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간도 없는데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백성이고 양반이고 모조리 도망치던 거 고려하면 아무래도 여성까지 동원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당시 남자들 성격상 여자들에게 바깥일을 시켰을 가능성도 전무하고요.


아무튼 명군의 개입 + 심유경의 배짱외교 + 행주대첩 3연벙을 맞고 왜군은 부랴부랴 경상도로 후퇴합니다. 슬프게도 가는 길에는 조선군이 이미 궤멸되어 버렸던 지라 학살을 엄청나게 자행했습니다. 진짜 알아보기 싫을 정도로 너무 끔찍하더군요. 그 때문인지 몰라도 오묘하게 이 시기가 수많은 의병들이 일어난 때이기도 합니다. 전면전을 행한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게릴라로 후퇴하는 왜군을 집요하게 괴롭혀 댔습니다. 결국 지친 왜군은 (제 추측입니다만) 심유경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평화협상이 깔끔히 끝나길 원하게 됩니다. (지난 글의 진주성 대학살이 딱 이 시점입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땅 절반+명나라 선물을 요구해버립니다 (...) 거기에 심유경은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황제에게 '왜인이 조공국으로 받아만 준다면 물러간다 합니다.'라고 보고해 버립니다(...) 심유경은 나중에 보고가 거짓인 게 들통나서 머리가 잘려버립니다. 이렇게 평화협상이 애매하게 진행되는 동안 명나라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밍기적거리고 원균은 색시들이나 끼고 놀다가 칠천량에서 조선의 수군을 증발시켜 버리는데,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의 도화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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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루나이
:
역사/조선 2017. 9. 4. 00:21


사진은 대충 이해를 돕기 위해 선을 몇 가닥 그어둔 것입니다. 조선 북부,남부의 대략적인 이동경로입니다. 빨간색이 임진왜란 시기 왜군, 노란색이 정유재란 시기 왜군, 파란색이 선조의 피난경로, 초록색이 왕비와 왕자의 피난경로입니다.

 

선봉대가 충주 평야 탄금대에서 신립을 완파하는 동안 후방의 왜군은 전라도로 진출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길도 잘 모르는 왜군이 전라도로 건너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축을 주고 백성들을 매수해 길은 알았겠지만 병사 수가 워낙 많아 좁은 길을 건너다간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니 자연스레 기습을 당한다는 것을 걱정했던 겁니다. 그래서 경상도의 왜군은 아주 기본 중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남해안 해안선을 따라서 서쪽으로 가면 전라도에 도달한다는 기가 막힌 발상을 해냈습니다. 이에 따라 부산에서부터 남쪽길을 따라 서쪽으로 쭈우욱 나아갑니다. 특히, 해귀 이순신의 기반을 제거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습니다.

 

제가 그림 솜씨가 이렇습니다... 재미로 봐주십시오.


이렇게 나아가다보니 남쪽은 남해와 닿아 있고 나머지 삼면은 해자(방어용으로 만든 인공강)와 강으로 둘러싸인 진주성에 가로막히지만 지상전에는 자신이 있다는 마음으로 공성전을 준비합니다. 다만, 진주성 공성전은 '치열하게 싸웠다.' 정도의 기록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반적인 공성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당시 조선의 성은 크게 2가지로 이루어진 방어구조물이었습니다. 돌이나 흙으로 쌓은 성벽 + 성 주변을 흐르는 강 또는 해자가 그 요소들입니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성을 함락시키려면 공격군이 최소한 수비병력의 3배가 되어야 한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성의 방어력은 강건했습니다.


공성전은 그림에 적어둔 순서로 이루어집니다.

1. 일단 성 주변에 모입니다. - 안전한 곳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먼저 간 아군이 고슴도치가 되는 것을 더 많이 보게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후방의 병사들의 사기가 점점 떨어졌을 겁니다.

2. 해자를 메웁니다. - 주변 흙, 모래 등 적당한 건 뭐라도 자루에 담아서 뛰어와 뿌리는 겁니다. 보통 다른 곳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적의 시선을 돌리고 했지만 상대 장군이 눈치채거나 진주성처럼 사방이 물이면 어쩔 수 없이 죽어가면서 메웠습니다. 혹은 뗏목이나 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수도 있었습니다. 이 방법은 준비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만 병사들의 피해는 적었을 겁니다.

3. 성벽을 오릅니다. - 대표적인 구간입니다. 위에서 던져대는 돌, 부어대는 끓는 물&기름을 오직 방패 하나에 의지해 올라야 합니다. 방패가 있으면 안전해 보일 수도 있지만 화살이 옆에서 날아오면...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손은 사다리를 잡고 있어야 했는데 물과 기름이 사다리를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거기에 사다리를 밀어내기 위한 특수창이 있었는데 다 올라올 때 쯤 밀어서 낙사시켜 버렸습니다.

 

이 성이란 걸 이용하지 않은 예시가 탄금대 전투이고 잘 쓴 예시는 아래에 서술할 진주성 전투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리메이크 버전이었습니다. 원래 산길에 있던 것을 버리고 평지의 목 좋은 곳에 새로 지은 것이죠. 이는 조금 더 지키기 어렵더라도 더 많은 방향의 길목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북진도 평양을 끝으로 좌절되었고 해귀 이순신한테 셀 수도 없이 많은 병사들이 바다에 묻혀버리고 했던 약 3만 명의 왜군들은 목숨 걸고 몰아칩니다. 그러나 성 안의 관군 3000 + 의병 6000은 그걸 또 목숨 걸고 막아냅니다. 그러자 여태까지 온갖 공성전에서 조선군의 무능한 방어력만 겪어오던 왜군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수일에 걸친 공격이 실패하자 병사들은 의욕을 잃고 집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런 분위기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진주목사 김시민은 밤마다 피리를 불어댔습니다. 본격 조선판 사면초가라 할만하죠 -_-;; 아무튼 죽어라고 무의미한 공격을 반복하던 왜군은 마침내 공성을 포기하고 물러납니다. 개전 이후 최초로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한 전투였고 이순신이 육상에서의 기습에 대한 걱정 없이 왜군을 계속해서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진주목사 김시민은 전투 중 조총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며칠 못 가 사망합니다. 아마 파상풍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평화협상을 하는 동안 내려오는 군대 전체에 진주성만큼은 반드시 박살을 내버리라고 할 정도로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되었고 실제로 거의 10만에 가까운 군대가 일거에 몰아쳐 조선의 백성과 군인을 합쳐 9만 명 가까이를 학살해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심지어는 자기들도 아니다 싶었던 왜군 장수들까지도 성을 비워두면 공성하는 시늉만 하겠다고 했는데, 성 안으로 피신해 온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주둔 중이던 조선군은 왜군을 믿지 못 해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런 보복이 이루어질 정도로 임진왜란 동안 진주성은 전략적인 가치가 굉장히 큰 성이었고 이 곳을 초기에 지킴으로써 사실상 전쟁은 승리로 확정지어졌습니다. 물, 전제는 이순신이 패배하지 않아야 했던 건 변함이 없습니다.


지도 출처는 구글맵스입니다. 내용은 징비록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posted by 미루나이
:
역사/조선 2017. 8. 31. 05:10

원균이 조선 수군을 싹 증발시키고 나서 실종되자 조정은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집니다. 이에 선조는 국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아이고 이 장군, 내가 미쳤었네... 한 번만 도와주시게' 하면서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막상 복귀하니 배가 한 척도 없었던 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원균의 패전 이후 왜군 밭이 된 온 전라도를 목숨 걸고 돌면서 병사와 무기를 모으는 눈물 겨운 상황에서 마침내 배설이 끌고 온 13척을 인계받습니다. 하지만 배설은 이미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었고, 배멀미니 몸살이니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덜컥 탈영해 버립니다. 사실 거의 150척이 하룻밤 사이 싸그리 증발했는데 싸우러 나가는 게 두렵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일 겁니다.

 

그 덕인지 왜군의 자신감은 하늘을 뚫을 듯 올라가 있었는데 정찰대가 조선 수군을 겁내지 않고 쫓아오는가 하면 (이순신이 이에 분노해 못 따라갈 때까지 쫓아갔던 게 함정이긴 합니다) '? 님들 13척이네요 ㅋㅋㅋㅋ 한 판 붙어보실래요?' 하면서 똑같은 13척으로 덤비기도 했습니다. (웃긴 건 이번에도 이순신은 화나서 쫓아가고 왜군은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적을 2번 격퇴해도 이순신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 수군의 사기는 땅바닥을 기어다니고 왜군은 자기 앞바다처럼 돌아다녔습니다. 오죽했으면 조정에서도 선박 13척 모두 불질러 버리고 수군은 육군으로 재편성하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 때 그 유명한 이순신의 명언이 나옵니다.

- 신에게는 아직 13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힘써 싸운다면 적들도 감히 바다를 넘보지 못 할 것입니다. -


 


하지만 왜군도 그 놈의 귀신같은 이순신한테 하도 당한 게 많아서인지 작정하고 쓸어버리려 합니다. 133~300척 규모의 대함대를 이끌고 이순신을 찾아 서해를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참고로 현대 대한민국 해군의 전투함을 모두 합해도 약 150척이니 바다를 꽉 메운 적선이란 표현이 크게 과장도 아니었을 듯 합니다. 이순신은 숫적 열세 때문에 넓은 바다에서 싸우는 건 무리라고 판단, 한반도 남서쪽 끝의 진도 앞의 물살이 거센 '울돌목'을 전장으로 삼고 적들을 마주합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사기가 너무 떨어져 있던 터라 모든 리스크를 다 떠 안고 가장 앞장 서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장군이 죽으면 와해되어 버리는 군대의 특성을 생각해 봤을 때 모 아니면 도의 명운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물론, 평소에도 전투에 직접 참가하셨습니다만 이번처럼 제일 앞에 있게 되면 포와 총의 집중 사격을 받아내야만 해서 배로 위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도 조선을 버리려는 것인지 때마침 물살도 그림의 초록색 화살표처럼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침 해가 뜨고 나서 왜군이 자신만만하게 몰려들어오기 시작했고 명량대첩이 시작됩니다. 이순신은 오자병법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격려사를 합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한 명이 길목을 막고 버티어 서면 천 명이 어찌 떨지 않겠느냐?-

 

부끄럽게도 조선군의 나머지 12척은 수평선 근처까지 멀리 떨어져서 강건너 불구경을 하고 대장선 1 vs 133, 삼국지의 장판파를 해상에서 재현한 전투로써 시작됩니다. 당시 빠른 물살이 의외의 호재로 작용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수많은 배가 좁은 해협의 감당할 수 없는 물살에 휘말리면서 통제력을 상실하고 대장선을 향해 무차별 돌진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울돌목의 유속이 12노트 정도 되는데 카누의 평균 속력이 2~3노트입니다. 조선 노잡이들이 어떻게 버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좁은 해협을 끝까지 사수하고 있었습니다.


전투양상으로 넘어가면, 기본적으로 판옥선이 너무 높아서 일본군은 가져온 갈고리 혹은 판옥선의 튀어나온 틈을 활용해서 기어올라가 싸워야 했는데 조선군이 잡히는 거 다 휘두르고 (승자총통은 초기 형태의 화승총이었는데 이 물건이 휘어진 상태로 발굴되고 있을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을 겁니다) 던지는 걸 받아내며 올라가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세키부네끼리 부딪혀서 엉키고 판옥선을 기어올라가는 동안 날아오는 투사체에 맞아 죽고, 똘똘 뭉쳐 있는 함대에는 빚나갈 걱정 없이 장전되는 족족 포탄 날아오지, 비격진천뢰 날아오지... 어떻게 생각해보면 일본군도 참 불쌍할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한 척이 서서 버티고 수백척 + 매우 빠른 유속으로 미는데도 버티는 이순신은 왜군 입장에서 살아있는 악몽 그 자체였을 겁니다.

 


복원된 판옥선


그래도 단 한 척, 판옥선 단 한 척으로 어쩔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북치고 징치고 깃발 흔들어대면서 현령 안위를 불러들입니다.

-안위야! 싸우다 죽고 싶으냐! 아니면 네가 도망친다 하여 군법에 죽지 않을 것 같으냐?-

호통을 들은 안위의 함선은 적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갑니다만, 곧 적선에 둘러쌓여 위기에 처합니다. 기록상 전투 중 유일하게 적의 상륙을 허용했는데 (다시 말해 이순신의 배에는 한 명도 못 올라갔습니다) 정황상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대장의 배 옆으로 와서 함께 막는 게 아니라 정면 돌파를 감행해 한가운데로 들어간 듯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긴박한 와중에 이순신은 판옥선으로 세 척을 연달아 완파해서 안위를 구해냅니다. 안위에게 일갈을 날린 직후 호위를 맡기로 되어 있었던 김응함에게도 외칩니다.

-중군(호위장군)이 대장을 지키지 않으니 죄를 면할 길이 없다. 하지만 전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호통을 들으니 김응함도 용기백배하여 전진합니다. 그리고 하늘이 웃음지으시려는 건지 물살이 정반대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조선판 장판파에 이어 제갈공명의 신기까지 부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래그림과 같은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 중입니다.




돌파하기는 커녕 점점 아군이 위기에 몰리는 상황에서 왜적은 결국 오후에 달아나기 시작하였으나 함선소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안 그래도 어려운 회전이 잔뜩 뭉쳐 있는 바람에 더 어려워지고 주변이 온통 섬이라 빠져나가긴 커녕 여기저기 섬에 갔다박아버립니다. 종국에는 말 그대로 잔디깎이처럼 크고 무거운 판옥선 12척에 잡초마냥 쓸려나갑니다.

 

양측의 기록을 종합하면 일본군은 약 절반의 군사가 전사했고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자신의 안택선(판옥선만큼 덩치가 큰 장군선입니다)과 함께 바다로 가라앉았고, 마다시라는 놈은 죽어서 바다에 둥둥 떠다녔는데 항복한 왜인 준사에 의해서 신원이 밝혀지는 바람에 뱃머리 여신상 마냥 토막나서 판옥선에 전시되었으며장수들이 대부분 중상을 입었고 이순신의 역사적인 패전을 기록하라고 보냈던 모리 다카마사라는 놈은 전투 중 물에 빠졌고 급하게 구조되어 탈출했다고 합니다. 조선은 대개 판옥선이 앞장서고 뒤에 보조선들이 배치된 반면에 왜군은 세키부네가 앞장 서고 안택선이나 특별한 배들이 후방에 배치되었음을 고려하면 처참해도 너무나 처참하게 전방부터 후방까지 모조리 박살났던 것입니다. 한 편, 이 와중에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끝까지 PTSD 증세를 보이며 후방에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명량 대첩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배의 보수와 병사들의 치료, 물자 보급 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후퇴하고 왜군은 명목상 승리를 거두어 꿈에도 염원하던 서해에 진입합니다만... 트라우마 수준으로 이순신에 대한 공포감에 벌벌 떨게 됩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전투도 못 한 채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수군은 말이 수군이지 병사수송선 수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영화 명량에 나왔던 판자나 사다리를 걸치고 달려올라가는 건 고증오류인데 그런 무거운 걸 실을 무게도 아쉽고 (속도가 줄어듭니다) 실어도 판옥선이 너무 높아서 의미가 없기에 애초에 세키부네에는 갈고리만 싣고 다녔습니다.

 

육지에서는 한창 한양을 향해 진군 중이던 왜군이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듣고는 넋이 나가서 보급로를 찾아 후퇴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도 의심병 말기 환자가 되어버린 선조는 이순신의 공을 깎아내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대장군이 '조선의 왕아. 내가 지금 맘 같아서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축하하고 싶은데 전황이 급해서 못 가는 거니까 헛소리 하지말고 벼슬 올려주게' 라고 훈계하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승진시킵니다. 현령 안위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김억추를 대신해 전라우수사의 자리로 파격승진하게 됩니다.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7급 공무원을 3급으로 파격승진시킨 것 쯤 될 겁니다.

 

이후 원균의 손에 흩어졌던 수군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어찌저찌 살아남은 판옥선들이 합류하는 데다 진린의 명 수군까지 합류하며 안 그래도 무서운 이순신의 손에 다시 한 번 위력적인 함대가 쥐어집니다. 이에 더해 지상의 조선군과 명군도 사기충천하여 점점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결국 과거의 격언과는 달리, 한 사람의 명장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posted by 미루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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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2017. 8. 28. 10:15

때는 1592 7월 초, 기세 좋게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던 육군과 달리 왜 수군은 몇 차례 연속된 수전에서의 패배로 어느 정도 위축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당시 왜군은 봉건국가였기에 각각의 영주가 자신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비교적 자유롭게 공세를 가하는 기본 전략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승리가 반복되는 지상전에서는 순조로웠던 반면 싸웠다 하면 기반이 다 날아가 버리는 수전에서는 감히 싸우기가 두려울 정도로 전력차가 압도적이었습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던 왜군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십수척 규모의 소영주 단위가 아닌 사령관의 지휘 하의 수십척 규모 함대를 운용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정규 함대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산도 인근의 견내량 (지금의 거제도) 인근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일본 함대가 정박하면서 한산도 대첩의 서막이 시작합니다.

 


파란색은 조선 수군, 빨간색은 일본 수군을 나타냅니다



당시 인근의 일본 수군은 크게 세 명의 사령관의 지휘 하에 나뉘어져 있었는데 가토, 구키, 와키자카가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함대를 모두 합하면 200~300척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어마어마한 데 비해 조선 수군은 판옥선 52척과 거북선 3척이 전부였습니다. 그 규모에 의한 확신이었는지 아니면 육상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인한 기세가 아직 남아있었던 것인지 와키자카는 상당히 자신에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웅크리기만 하는 다른 일본군과는 달리 이순신이 대여섯척의 판옥선으로 미끼를 던지니, 덥석 물어 견내량을 지나 한산도에 매복 중이던 조선 수군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배는 그 어마어마한 무게를 사람이 노를 저어 움직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물론 순풍이면 바람을 타고 가면 됩니다) 도망치는 적을 쫓기 위해서 거의 25KM를 전속력으로 항해하는 동안 사공들이 이미 지치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 상태로 위의 그림처럼 빠른 물살을 타고 견내량을 지나자, 섬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판옥선과 도주하던 판옥선이 전열을 가다듬고 전열이 무너진 채 뭉쳐있는 일본군을 학의 날개모양으로 포위해버립니다.


사족이지만 이는 적은 수로 다수를 포위한 역사상 첫번째 해전이며 지금까지도 사례가 몇 되지 않는 해군을 이용한 매복 작전으로, 전쟁사적인 가치가 어마어마합니다.

 





포위는그림의 형태가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는데 전 다른 여러가지 주장에 제 나름의 생각을 더해 아랫 그림 형태로 완성될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근거는 물살의 방향 (녹색 화살표) + 설계상 180˚ 회전이 힘든 세키부네로, 왜군이 비어있는 북쪽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다가 결정적으로 와키자카와 휘하의 장병들이 상륙한 섬이 그림의 오른쪽에 나와있는 한산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뜩이나 적은 수로 다수를 감싸야 하는 상황에서 파도와 암초는 아군도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굳이 섬 앞에 전선을 배치해서 포위를 했을까 싶습니다. 다만, 어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산도가 무인도였기에 먹을 것이 없으니, 왜적이 상륙해도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게 만드는 것을 노렸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대로의 포위진을 상상해 보시는 것도 즐겁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포위 이후 왜군은 한 방향으로 뚫어보려 시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이미 전열이 무너져서 질서정연하게 한 방향으로 가는 건 가능할 리가 없었고 서로 부딪혀 침몰하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해류와 포위진으로 인해 그물망에 걸린 물고기처럼 한 점에 수백척이 뭉쳐있는데 그 곳에 대고 포탄과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집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왜군 한가운데엔 불 뿜는 용머리 선박이 3척이나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헤집고 다닙니다. 마침내 사기가 바닥난 왜군의 아비규환 속에 전투가 끝났습니다.4척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완파 또는 나포되었고 와키자카는 한산도에서 미역만 13일 동안 먹다가 구조되고 일부 장수는 할복하는 등, 왜군의 생지옥으로 한산도에서의 전투는 종결되었습니다. 반면 조선군은 3명 전사에 10명 부상, 전선 모두 무사라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의하실 부분은 일본군의 피해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 자료마다 편차가 큰 편인데 저는 최악의 피해를 기준으로 작성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조선의 배꼬리만 보여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다니게 되었고 3번글 썼듯이 어떤 경우든 요새에만 틀어박혀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노에 가득차서 길길이 날뛰고, 왜장들은 살기 위해 김응서를 포섭해 원균이 군권을 잡아 칠천량의 악몽을 일으키게 만들었으며, 굶주린 왜군들이 더더욱 혈안이 되어 조선 국토를 되는 대로 약탈하고 다니게 만들었으니 이는 너무 말도 안 되는 승리의 안타까운 부작용이라 하겠습니다.

posted by 미루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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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2017. 8. 27. 18:58

이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손에 파멸하기 전에 어떻게든 해보려고, 일본은 장군을 갈아치우기 위한 계책을 세웁니다. 그 계책이란 것은 조선군 내에 첩자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경상우병사 김응서라는 인물이 바로 그 대상이었는데, 일본군 측에서는 지휘관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처럼 꾸며서 조선군을 살살 유혹해냅니다. "가토가 0 0일에 000에 상륙한다고 한다. 조선군이 처리해줬으면 한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월척이다 싶었던 김응서는 이 말을 조선 조정에 전했고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서둘러 가서 섬멸하라고 합니다. 근데, 당시에 휴대폰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의사소통이 꼬여서 실행되진 못 했습니다. 그런데 공적에 눈이 멀었던 원균이 '신이라면 단숨에 가서 전멸시켰을 것입니다.' 라고 장부를 올립니다. 이 인간은 전쟁 초기부터 공적에 아주 목이 말라 있었던 터라 섬에서 양민들 머리를 자른 다음 노획해 두었던 일본군 무기와 같이 조정에 보내서 일본군을 무찔렀다고 보고해 실적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적이 보이면 소수건 다수건 일단 도망가고 그 공백을 이순신이 메꾸고 있을 정도로 무능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늘이 버린 것인지 때마침 날씨가 지속적으로 안 따라주어서 이순신은 적극적인 공세를 시도하지 않았고, 원균이 계속해서 자신의 능력을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명나라 덕분에 혼란을 수습하고 평양에서 당파 싸움 중이던 관리들이 '이순신의 힘이 너무 세서 사단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자신 있다니까 원균에게 한 번 시켜 보자'는 의견을 전합니다. 이 시점부터는 선조도 이순신에 대한 신뢰 대신 의심을 보내기 시작했기에 이순신은 파직되고 원균이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이 인간은 막상 임명되고 나니 겁에 질려서 공격을 안 하고 싶어했으나, 퍼뜨리고 다닌 말이 있어 적당히 해안선을 돌아다니면서 약하다 싶은 적을 만나면 공격해 전공을 올립니다. 물론, 핵심인 부산진 공격은 뒤로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권율 장군이 기다리다 지쳐,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으로 다스리니 이제는 악에 받쳤는지 진군하기 시작합니. 온갖 황당한 사건들이 많은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다루겠습니다. 하나만 이 글에 적자면, 작전 회의용 요새 역할을 하던 건물이 전라좌수영 내에 있었는데 그 곳에 기생들을 가득 채우고 매일 술판을 벌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150여 척의 조선 수군이 칠천량으로 향하고, 밤에 또 술을 마신 것으로 추측되는 원균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군량선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왜군이 야밤을 틈타 작은 배 몇 척을 보내 방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느라 정확한 원인을 모르던 원균은 부랴부랴 퇴각을 명령합니다. 그것도 막다른 골목 쪽으로 함대를 다 밀어넣었고, 조선 수군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자마자 적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원균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령을 전함대에 내립니다 '전원. 배를 버리고 육상으로 도망치라!' 그렇게 약 60여척의 왜선의 기습으로 조선수군 전체가 말끔히 증발해 버립니다. 그나마 배설이 원균의 명령을 무시하고 휘하의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칠천량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배들이 후에 이순신 장군이 재기하는 발판이 됩니다. 그러나 배설은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이 날 이후로는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영화 명량에서 거북선에 불을 지르는 인물이 배설입니다. 왜적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거북선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원균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섬 안으로 호위병들조차 따돌리고 도망간 원균을 대여섯의 왜적이 쫓아들어갔다고 합니다. 이후로 원균이 목격되지 않았기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억기 등의 우수한 장군들과 장비가 모조리 불타버렸고 왜군은 드디어 기존에 목표했던 수륙양진의 계책을 실현할 수 있게 됩니다. 수군이 완전히 소멸했기에 더 이상 그들을 막아설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나라와 이어가던 휴전협정을 그만두고 정유재란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도 이 칠천량 해전이었습니다. 크게 당황한 선조는 부랴부랴 이순신을 복직시켰고 몸도 마음도 망가진 채로 배설의 전선 12척을 양도받은 이순신은 다시 한 번 바다로 나아갑니다.

posted by 미루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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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2017. 8. 27. 18:35

신립의 패배 이후 급하게 북쪽으로 도망가는 선조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첫 승전 소식을 안겨준 것은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즉, 선조의 인사 정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고 할만합니다. 유성룡에 따르면 승전보를 듣자마자 선조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사실은 그저 희소식 정도로 끝난 게 아니라 조선 전역에서 의병을 끌어모으는 일종의 선전물 역할을 톡톡히 해 줍니다. 바로, 우리 장비로도 왜군을 무찌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줬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참으로 비상한 것이 전쟁을 글로 배운 양반만 90% 이상 있는 나라에서 오직 혼자만 한국 역사상 (조금 과장하면 세계 기준으로도) 최고로 평가받아 마땅한 수준의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신형 전선인 판옥선을 다수 건조하고 주요 섬에 위치한 거점들의 보수를 아주 확실히 하는가 하면 (똑바로 안 한 병사들은 정도에 따라 곤장을 치거나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거의 유일하게 규율을 갖춘 군인을 훈련시켜 두었습니다. 다른 지방에서는 과거에, 성 보수에 백성들을 동원하면 농사 망칠 일이 있냐고 도리어 역정을 냈고 특히, 수군은 워낙에 일이 힘들어서 (노 젓기, 배멀미, 짐 나르기 등 때문에 기피 병종이었습니다) 소집 명령에도 불참하는 식으로 규율이 엉망이었으나 악조건을 딛고 강군 양성에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는 조선군의 400KM에 걸친 릴레이 도주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순신 장군은 한탄을 금치 못 했습니다.특히 조선 내에서 가장 큰 수군의 수장인 경상우수영의 원균도 달아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엄청난 분노를 표출하셨습니다. 이 일이 원균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계기 가운데 하나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침착하게 도주병들을 잡아오고 전라양도에서 수군들을 소집하고 (일부 군관들이 집으로 도망가서, 잡아와 목을 베어가며 규율을 유지했습니다) 승리에 취한 왜군에게 쓴 맛을 보여주며 돌아다니십니다. 이렇게 몇 달 정도 두들겨 맞고 나니 일본군이 겁에 질려서 이젠 조선 수군만 보여도 허겁지겁 도망다니기 바쁘고, 조선 수군이 공격 태세만 취했다 하면 전부 배에서 내려서 해안가 요새에 틀어박혀 버립니다. 하지만 육군이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무너졌다는 소식에 장군은 또 한숨을 쉬고, 더더욱 온 힘을 다해 왜구를 찾아서 바다를 뒤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역으로 장군의 연속적인 승전에 해상보급경로가 끊긴 왜군은 민간에 대한 약탈을 더 강하게 하기 시작합니다. 수도를 점령하고 전쟁을 끝내자! 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적질로 변형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서도 이걸로 점령지(=전라도,평양이북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부)는 거의 초토화가 되어버립니다. 전후에 농지가 30% 수준만이 남았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약탈하고 다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미루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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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2017. 8. 21. 21:33

부산이 순식간에 함락당하고 나자 경상좌병사 이각, 경상우수사 원균을 포함한 온갖 고을의 수령과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적이 온다는 소식만 들려도 모조리 달아납니다. 정부에서는 소식이 닿자마자 이일을 내려보내고 각 고을(도망치지 않은)에서 모인 신병들은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상주에서 그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왜군이 먼저 상주에 도달해 버리자 병사들이 겁에 질려모조리 달아나 버립니다. 바닷길에선 원균에게 왜적에게 나아가 싸우라는 명령이 왔으나 무서워서 무시해버립니다. 겨우 도착한 이일이 약속 장소에 병사가 없어 당황했다가 부랴부랴 수백명을 모아 간이훈련을 시키는 와중에 적의 기습을 받고 이마저도 와해됩니다. 이일은 옷도 다 찢어져 거의 알몸인 채로 신립이 주둔하던 충주로 도망갑니다. 이외에도 왜군이 진군하는 도중 나름대로 병력들이 막아서려 했습니다만은 장군이 먼저 도망가서... 병사들도 뒤따라 도망가는 일이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습니다. 벌떼같은 의병이야기는 아직은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의병 때문에 그나마 왜적들의 진군이 지연되었다.' 라는 서술은 근거가 없는 셈입니다.

 

정신없이 죄다 도주하는 와중에 명장 신립이 북방전선에서 내려와 한양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읽어보니 이 양반이 힘도 세고 싸움도 잘 하는 건 맞는데 전략적인 식견은 증명되지 않았고,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더러워 군관,병사들이 안 따라가려고 주저하는 것을 유성룡이 지원군으로 쓰려고 모은 이들까지 합쳐서 전부 신립에 딸려보냅니다. 선조도 사활을 걸 생각이었기에 북방의 8000기마대 (전부 정규군으로서, 이 때의 전멸을 기점으로 조선은 영원히 이 정도 숫자의 기병을 회복하지 못 합니다)를 신립에게 딸려보냅니다. 서류상으로는 나름 명장이었던 이일도 합류하면서 당시 조선 기준으로 반드시 이길 최강의 군대가 이렇게 충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명장 신립은 조령(소백산맥의 좁은 길목)을 지켜야 한다고 유성룡, 주변 장군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탄금대의 논밭에 진을 칩니다. 기마대의 특성상 평지가 매우 유리한 것은 맞았습니다만 논,늪지 같은 곳은 말이건 사람이건 땅이 질척해서 거의 기다시피 해야합니다. 최악의 장소에서 적들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한 편, 일본은 조령을 건너기 전에 수차례나 매복이 없나 확인을 했는데 아무도 없자 조선엔 장군이 없다면서 비웃으며 넘어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늪이나 다름없던 탄금대에서 기다리던 신립의 기마대와 일본군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당시 조선은 창자루가 짧아지고 극단적인 궁병 위주의 편제로 갔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1번 글에 언급한 귤강광이 창자루가 짧다고 조롱했던 기록이 남은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 대충 비교를 해놨는데 (쓸저퀄 죄송합니다) 일본의 장창이 4.5~6.5m 이던 것과 비교해서 조선은 장창이 3m 안팎, 그 외의 단창이나 기병용 창들은 1.3~1.6m정도라고 합니다. 일본은 봉건국가라 영주별 생산이었기에 길이 편차가 크고, 조선은 중앙 생산이라 편차가 작습니다. 이러한 길이 차이는 전투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일본은 주력인 조총수들이 장전 하는 동안 창병들이 긴 창으로 일종의 벽을 세워서 적이 접근하지 못 하게 하는 반면에 조선은 활을 주력으로 창병들이 궁병들을 보호하며 싸우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조총의 장전이 제자리에서 숙련자가 2분 이상 걸릴 정도로 정적인 반면에 (창병도 저 긴 것을 들고 가만히 서거나 무릎 꿇고 대기) 활은 장전과 조준에 채 10초가 걸리지 않기에 비교적 동적이었습니다 (창이 무거우면 자리를 자주 옮기기 힘들어지니 짧은 것을 들고 재빠르게 움직임)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에 만능 무기 역할을 차지하던 활과 중세의 만능 무기 조총의 대결이 펼쳐진 전투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후대의 한국내전을 고려해보면 한반도가 무기vs무기를 여러 의미에서 많이 겪었습니다)

 

무기차이는 길게 설명했는데 전투는 사실 별 게 없습니다. 신립은 여진족을 상대하던 것처럼 돌격 명령을 내렸고 멋지게 달리면서 활을 쏘던 궁기병들은 조총 포화를 뚫지 못 하고 말이 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후퇴명령을 내렸지만 늪이라 후퇴가 느리니 계속 죽어나가고 조총 소리에 말과 군사들이 모두 겁에 질립니다. 거기에 패퇴했으니 이미 사기도 바닥을 쳤습니다. 신립이 안 그래도 조령을 버리고 온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진 군대를 강 뒤편의 언덕에 배치시킵니다. 흔히 말하는 배수진을 친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다 한 것이겠지만 사기가 이미 떨어진 군대가 승리할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전투라고 할만한 것도 없이 거의 학살에 가깝게 조선의 모든 정규군이 탄금대에서 죽어나갔고 신립은 적을 쏘다 죽었다는 말도 있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여기서 전사합니다. 그 와중에 이일은 이 생지옥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합니다.


일각에서는 신립이 서두르느라 일을 망쳤다. 라는 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진군 중이었는데, 이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씩 각개격파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조령과 같은 산맥을 지키고 있다가 협공이라도 당하면 규모가 큰 신립부대의 특성상 보급에 어려움을 겪어 결국 전멸해버릴 것이 명백하니 도주로가 확실한 곳을 전장으로 택했고 말입니다. 물론, 그러면 적을 무시했다라는 뜻이니 여전히 신립을 고평가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당시 전국시대를 거치며 당대의 유럽보다 조총부대의 운용이나 기술 면에서 한 발자국 더 앞섰다는 평가를 받던 일본이 맨날 책이나 읽으며 우리 상국의 위용만 봐도 오랑캐들이 물러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조선을 혼쭐낸 전투였다고 하겠습니다. 전투 이후, 배수진에서 군사가 하나도 빠져나오지 못 해 조선군은 말 그대로 무(無)가 되어버렸고 근처의 충주성도 거의 비워두다시피 했기에 순식간에 함락, 한양까지 허허벌판이 되어버립니다. 그리하여 개전 이후 14일 만에 한양에 적이 도착하는데, 조선이 이 시점에 다급히 지원요청을 하자 첩자가 전해주는 전황을 듣고 있던 명나라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조선이 일본과 협력해 자기한테 공격해오는 줄 알고, 확인을 위한 사신만 몇 명 보내게 되고, 지원군은 늦어지게 됩니다.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 제 2의 국가였기에 이런 의심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선조도 군사가 없으니 장군 하나에게 지휘를 맡겨서 한양을 지키라 한 뒤에 개성을 향해 떠나고, 선조가 떠나자마자 그 장군도 도망가고 백성들은 자기들 지켜준다 그래놓고 도망갔다고 성을 죄다 불질러 버리는 등,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제승방략하려고 한 군데 쌓아놓은 군량미는 결국 죄다 일본군이 배불리 먹는데 쓰였던 건 덤입니다. 당시 조선이 도로망은 또 잘 되어 있어서 한양까지 일본군은 헤매지도 않고 잘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참극의 도중에 선조에게 도착한 전라도의 전령이 "옥포에 정박한 왜군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와 함께 대파하였나이다." 라는 희소식을 전해줍니다.


사진은 현재까지 왜군의 대략적인 진격경로와 격전지입니다.



경상 및 전라 좌,우도를 대략 구분해 보았습니다. 한양에서 봤을 때가() 기준이라 동서쪽과는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책에 잘 없어서 혼란스러우실까봐 발로 그려 넣었습니다 (실제론 점영토라 좀 많이 다릅니다)





내용출처는 유성룡의 징비록,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선조편입니다.

그림출처는 N사 블로그, 구글입니다.



posted by 미루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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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2017. 8. 21. 21:02

저번 글에 제승방략을 도입하고 막장 오브 막장을 향해 분노의 질주 중인 조선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제도의 오류로 인해 무슨 사단이 나는가를 구경해 보아야겠죠...

 

1510년에는 삼포왜란이, 1555년에는 을묘왜변이 터지면서 조선은 산소호흡기나 겨우 달고 있던 진관 체제를 버리고 제승방략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제도를 큰 전쟁에서 한 번만 적당히 시험해 볼 수 있었어도 참 좋았을텐데 기회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왜구 약간을 제외하고는 왜인들이 유순하게 잘 지냅니다. 그러다가 제승방략제는 유래가 없는 큰 규모의 20만명이 쳐들어온 임진왜란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됩니다.

 

전시체제가 바뀌건 말건 조선은 언제나 그렇듯 동아시아의 2등으로 명나라랑 같이 사이좋게 놀고 있었는데 1586~7 년 즈음해서 대마도인들이 일본왕 바꼈는데 걔네가 외교하고 싶어해염 하면서 접촉해옵니다. 당시 일본은 대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군주였던 오다 노부나가 가문을 전복시키고(일본사는 잘 몰라서... 나중에 열심히 공부할게요 ㅠㅠ) 자신이 관백의 자리에 오른 상태였는데 상선비국 조선은 반역자들이랑은 외교 안 한다면서... 사신이고 뭐고 다 무시해 버립니다. 기세가 한껏 올라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시당했다고 길길이 날뛰고 조선은 반역자와의 대화는 없다 하면서 긴장이 이어지는 와중, 가운데 낀 대마도만 새우등이 다 터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대마도는 그래도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면서 (귤강광이라고 4가지 없는 놈이 제일 유명하죠) 이 얘기 저 얘기 한 것 같은데, 조선 관리들도 슬슬 조짐이 이상하다는 것과 전운이 감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대마도가 평화의 상징인 공작 한 쌍을 보냈는데 기이한 새라고 조선은 숲에다 버렸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신의 계시였던 것 같습니다 ㄷㄷ;;

 

그래도 바닷길은 위험하다고 (지도상으론 거리가 얼마 안 되지만 무려 해협이 두 개나 가운데 있습니다. 거친 바다란 뜻이죠) 안 갈려는 거 대마도 사신이 직접 길 안내하겠다고 설득설득을 해서 1590년에 드디어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11월쯤이 되어서야 히데요시랑 면담을 하고 (반란 잡으러 가 있어서 수도에서 기다렸습니다) 다음 해 2월에 조선에 돌아오는데 내용이 아주 가관인 것이... 히데요시 태도가 신하국 사신을 대하는 듯 했고, 왕보고 직접 와서 알현하라 그러고, 사신 알현 중에 자기 애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아주 무시무시를 했다고... 조선인들이 그 태도에 분개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어쨌거나 상사 황윤길(서인)은 "확실히 쳐들어 올겁니다." / 부사 김성일(동인)은 "아뇨 저 미개한 것들이 어찌 건너오겠습니까 껄껄" 식으로 (실제로 저렇게 말했다는 게 아닙니다) 갈라져서 싸웠습니다. 일부 책에서 "당시 우세한 동인의 의견에 따라 황윤길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라고 서술하는 듯 하던데 실제로는 유성룡이 '성일아, 그거 틀리면 알지?' 하니까 김성일이 바로 '아니 그게 아니고, 혼란을 방지하고자...' 로 주장을 굽히면서 조선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명나라는 일본의 수상한 낌새를 이미 눈치 채고 조선측에서 연락이 없자, 조선이 같이 침공해 오는 거 아니냐고 내부적으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일본에 통신사 보내는 문제로 늦게나마 사신이 명나라에 당도하면서 그 의심은 일단락됩니다.

 

이 양반들이 책쟁이지만은 그래도 나름 머리는 잘 돌아가서 남동쪽 해안에 최강의 장군 하나 파견하려고 왕과 신하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는데, (결과론적으로 임진왜란이 터진 시기를 고려해보면) 관찰사가 가서 군량이라든지 병사들을 점검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한 채로 이각이 임명되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급하게 임명되어 그랬는지 능력치가 영;;; 거시기했습니다) 그 후, 성 점검을 하면서 성벽,해자 보수도 하고 새로 벽도 쌓고 하는데 농민,아전,양반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평화 시에 뭔 짓거리냐고 제대로 협력을 안 합니다. 그래도 선조가 이 때까지는 어릴 때 평가 그대로 '총명하고 지혜로운' 왕이었던지라 이순신, 유성룡, 신립 등(평가 좋고 성과 있는)의 직위를 신하들이 반대하는 것을 무시하고 하던 대로 (예전부터 전쟁 날까봐 불안하다고 이런 식의 인사를 했습니다) 급속 승진을 시켜줍니다. (덕분에 이순신의 전설이 나올 판은 마련되었으니 선조도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은 있었습니다.) 아무튼 조선이 나름의 준비를 하는 동안 2년간 3번에 걸쳐 흰 무지개가 햇무리를 거쳐 해를 꿰뚫었고 (흰 무지개 - 다양한 색이 하나로, 통일된 일본 / 햇무리 - 태양을 감쌈, 조선 / - 천신, 명나라) 선조의 처소에 괴짐승이 나타나는가 하면 숲에서 오색조가 날아다니는 등 여러모로 괴이한 징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1592 4월에는 일본인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사라지더니 13일에 일본군이 부산진에 상륙합니다. 부산진의 조선군은 최선을 다해 대비를 했었습니다만 평소의 수십~수백명이 아닌 뜬금없는 20만 가까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수백명의 경비대 수준이었던 정발과 부산진 군사들이 몇 시간 버텨내지도 못 하고 전멸합니다. 뒤이어 벌어진 동래성 전투에서 부사 송상현은 악착같이 어금니 물고 버텨보았습니다만 기어이 왜군들이 성벽을 넘었고, 관청에서 업무복으로 갈아입은 뒤 정자세로 앉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왜군도 감동해서 송상현의 시신은 잘 묻어주고 묘비도 하나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육전에서 이런 멋진 영웅들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초반부의 영웅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




내용출처는 유성룡의 징비록, 조선왕조실록:선조편입니다.

posted by 미루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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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2017. 8. 21. 17:00


조선 초기엔 고려시대에서 이어져 온 방위 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북방의 국경선에 익군, 남방에 영진군을 두어 침입해 들어오는 것 자체를 막아내는 걸 목표로 하는 체계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국경선이 뚫리는 순간 수도의 근위대를 제외하고는 군인이 아예 없어서 언제든지 대참사가 발생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죠. 그래서 1450년대 세조의 통치 하에 개편에 개편을 거쳐서 군익도 체제 -> 진관 체제가 완성되는데 이것은 전국 각 지역을 대단위(주진), 중단위(거진), 소단위(제진)으로 나누어서 주진의 감독 하에 각자 알아서 방위를 담당하게 하는 제도였는데 군사력의 혁신적인 강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당장에 병사 숫자의 단위가 아예 달라진 데다가 십수 명의 유목민이나 왜적이 약탈하러 오는 경우에 수백명씩 끌려 다닐 필요 없이 고을 경비대 수십 명이 막아내게 되었으니 효율성 면에서도 압도적이었죠.

 

하지만 평화가 전쟁을 잊게 만든다고 하던가요. 로마 속담에서는 '평화 시에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고요. 진관 체제는 유사시를 대비한 훈련, 전시 지방의 방위 외에도 주기적으로 한양에서 중앙군으로서 복무(중앙에서 다시 북쪽에 파견 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 많이 추웠을 겁니다;; 그래서 전래동화 중에 꽃분이이야기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걱정되는 남편에게 맛있는 걸 싸들고 간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ㅠㅠ)를 해야했는데 중앙에서 복무를 하고 나서도 지방에서 부역을 또 맡아야 해서 백성들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복무를 좀 줄이면 될 걸 가지고 관리들은 책상머리에서 토론 끝에 군역 대신 옷감을 세금으로 내도록 하는 방군수포제라는 걸 꺼내놓습니다.

 

방군수포제 실시 이후 처음엔 세수도 확보되고 부담도 덜어주는 듯 했습니다만 이놈도 폐단을 발생시킵니다 ==... 변호하자면 관리들이 현실을 전혀 모를 수 밖에 없는 게 양반 계층은 법적으로는 군역을 져야했으나 실제로는 특권층이라 안 갔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각 진의 수장, 그러니까 마을 수령이나 관찰사 이런 사람들이 지휘관(=맘대로)으로 있는 곳에서 애초에 양반 자제들을 그 힘든 군역 지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 어떤 의미에선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윗사람 눈치 안 보고 막 보내다가 무슨 화를 당할 지 어찌 알겠습니까.


기본적으로 지방군 사령관은 겸직의 개념이라 봉급이 없었는데... 그들이 보너스 타는 법을 깨닫게 됩니다. 병사를 강제로 전역시키면서 옷감을 내도록 하거나 정해진 옷감만 내라고 협박하면서 지방 상인하고 짜고 치는 겁니다... 원래 옷감()이 직접 만들거나, 하나에 쌀 반말 정도면 되는 가치인데 그걸 쌀 5말에 물고기랑 약초도 좀 얹고 해야 팔아주는 상인들과 손을 잡아버린 겁니다. 탐관오리가 따로 없죠. 그러나 명칭이 ''이니만큼 세금을 내는 사람에 한해서만 징수가 가능했는데 백성들이 방군수포제 속에서 점점 가난해지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지주층에게 땅을 팔고 노비 신분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가속화되면서 아예 군역 대상자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점점 서류 상엔 군인이 있는데(양반 등등) 실제론 군인이 없는(양민->노비) 기현상이 발생합니다. 다들 경제력이 되면 세금을 내고, 안 되면 노비가 되어 군역은 안 지게 되었습니다. (이래놓고 부역(=나라의 공사)은 또 지고 있었다는 게 함정이긴 합니다. 이렇게 겹쳐대니 노비가 안 되고 버틸 수가 없었겠죠) 이대로 가면 언젠가 심각하게 터질 문제였는데 그나마 다행히도 임진왜란 전인 1510년의 삼포왜란과 1555년의 을묘왜변을 계기로 방위 체제가 제승방략 체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제승방략은 유럽으로 따지면 고대 그리스식 전략입니다. 각지의 병사를 한 군데 모아서 중앙에서 임명한 사령관이 그들을 통솔해 적을 일전에 격파해버리는 겁니다. (그리스에 비해 규모가 좀 많이 커졌지만요) 이 전략은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항상 많은 군사수가 보장되고 가장 유능한 사령관에 의해서 통솔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만은 (평화가... 정신을... 좀먹는다... 으어어어) 수령들이 워낙에 유학공부만 하고 있다보니 전쟁에 너무나 무지해서 훈련을 아예 경시했고 (수백년간 훈련이 사실상 없어왔으니...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습니다) 문관만 마구 배출되는데 이들을 통솔할 만한 장군감이 존재해 봐야 북방 전선에 극소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론적인 토대와는 유리되어 군사 자체는 많이 소집할 수 있었습니다만 페르시아군, 당나라군 같은 오합지졸들인 데다가 제대로 된 전술을 구사할 줄도 모르는,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목각인형 급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소규모 전투에서는 그럭저럭 성과를 발휘해서 유지되었으나 1592 4, 임진왜란 당시에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해안선 방위대 외에는 전투다운 전투도 못 해보고 패퇴하고, 간신히 상주 근방에 병사들이 모였으나 중앙의 장군이 늦게 도착해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와해되어 버리는 등의 개판에, 당대의 명장 신립과 조선이 영혼까지 끌어모은 정규군이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털리고, 평양까지 신칸센이 설치되는 걸 보고 나서는 조선에서도 이 체제를 포기하게 됩니다...

 

책쟁이들 바부...

 

출처는 제 머릿속 나름의 군사지식 + 네이버 지식백과입니다.



posted by 미루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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