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에 해당되는 글 29건
- 2023.08.21 :: 윌리엄 이야기 3 - 한편 영국에서는
- 2023.08.15 :: 윌리엄 이야기 2 - 북방인들은 왜 배에 올랐나
- 2023.08.09 :: 카드 신규발급 후 실적 면제 기간 관련
- 2023.07.15 :: 윌리엄 이야기 - 1
- 2017.12.18 :: 제국과 민족 국가
- 2017.12.13 :: 테르모필라이 전투 (Battle of Thermopylae)
- 2017.11.08 :: 팔랑크스 (Phalanx)
- 2017.10.19 ::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 2015)
- 2017.10.16 :: 중국의 배짱 외교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
- 2017.10.12 :: 007 북경특급 (國產凌凌漆, 1994)
- 2017.10.11 :: 임진왜란 9 - 정유재란과 종결
- 2017.10.09 :: 간츠 (GANTZ, 2011)
- 2017.10.09 :: 인천상륙작전 (2016)
- 2017.10.06 :: 임진왜란 8 - 피란과 명의 개입, 행주대첩
- 2017.09.27 :: 갓 오브 이집트 (Gods of Egypt, 2016)
- 2017.09.25 :: 아웅산 수지의 딜레마
- 2017.09.17 :: Hero of the Kingdom II
- 2017.09.06 :: 스파르타식 교육 아고개 (Agōgē)
- 2017.09.04 :: 임진왜란 7 - 진주성 전투
- 2017.08.31 :: 임진왜란 6 - 명량대첩
여러 귀족들이 경쟁하느라 난장판이었던 프랑키아 쪽과 달리
브리튼 제도에는 이미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의 정체성이 성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문제도 있었으니...
유럽 대륙내에서 명목상 교황 휘하의 여러 나라가 치고 박은 것처럼
'잉글랜드'라는 대륙 내에서 국왕 휘하의 여러 나라가 치고 박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권력을 잡으려면 라이벌 가문은 물론이고 형제끼리 등뒤에 칼을 꽂는 건 일상인데다
패배하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전재산을 들고 주변국으로 튀어버리는... 문화가 있었다.
(스포일러: 덴마크가 정복한 후의 지도라 잉글랜드가 덴마크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 나온 것처럼 수틀리면 동서남북 아무데로나 도망치기 딱 좋긴 했다.
여담으로 스코틀랜드 아래의 저 조그마한 스트라트클리드 왕국은 긴 역사를 가졌으나
딱 이 시기에 망하면서 사실상 잊혀진 게 불쌍해서 이름 정도 불러주고 지나간다.
잉글랜드인들이 지들끼리 등에 칼 꽂는 동안 덴마크, 노르웨이 출신의
북방인들은 또 신나게 여기저기 약탈하고 놀고 있으니 나라 상태가 아주 개판이 되어버렸다.
이 시기 잉글랜드 국왕은 '준비되지 않은 에텔레드'가 맡고 있었다.
(Aethelred the unready; 사실 Æþelræd Unræd는 '적절한 조언을 받지 못한 에텔레드'라는 의미지만 Unræd의 발음이 '운레드' 라 언레디랑 비슷해서 저렇게 불리게 되었다)
이 양반은 선대 잉글랜드왕들과 달리 전쟁, 정치, 외교 모든 영역에서 너무 재능이 없었다.
북방인들과 몇 번 붙고 박살난 후에, 조공을 바치면 북방인들이 돌아가 주니까
Geld(겔드)라는 세금을 신설해서 적당한 군대도 유지하고 조공에 쓰일 자금을 마련했다.
당연하지만 군대 빌려가더니 박살난 왕놈이 세금을 더 뜯어가니 귀족들은 폭발했고
어차피 안 싸워도 조공을 받기 시작하니 점차 1+1 느낌으로 북방인들은 약탈도 하고 조공도 뜯어갔다.
그 와중에 에텔레드는 신앙의 힘으로 신의 재앙을 이겨내자면서 교회에 기부를 늘렸다...
그러던 중, 북방을 통합한 스웨인이 영국사에 등장한다.
그림처럼 정복할 만한 곳은 다 정복한 그의 다음 타겟이 영국이 된 것이다.
(롤로가 노르망디 공작이 된 것에서 모티브를 얻어 자기도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다행히도 에텔레드는 나름대로 첩보를 입수해 급히 전선을 건조하고 해군을 준비했다.
말 많던 겔드를 군대양성에 거의 올인해 예산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서로 칼 꽂는 귀족들, 겔드에 대한 불만, 무능한 국왕에 대한 의심이 한 번에 터져
해군 내에 내전이 발생했고 군대의 절반 이상이 자기들끼리 싸우다 자멸해 버렸다.
잉글랜드가 혼자 삽질하는 동안 스웨인의 군대는 요크에 상륙해 물밀듯이 진군해 오기 시작했다.
에텔레드는 마지막 필살기로
"신앙심으로 극복하자!"를 다시 한 번 시전하고 교회에 돈을 더더욱 갖다 바쳤다...
당연히 상황이 해결될 리 없었고 잉글랜드의 몰락 직전에 정신이 돌아왔는지
그의 아들 에드워드와 알프레드를 급히 처남에게로 피신시켰다.
그곳은 바로 노르망디였으며 다가올 불씨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을 아직 에텔레드는 모르고 있었다.
참고로 에텔레드는 싸우다 전사하긴 개뿔
런던 근처까지 적이 당도하자 와이프랑 같이 자기도 노르망디로 도망쳤다 ^오^
도망은 잉글랜드의 유구한 전통이니까~
조선왕 선조를 런조니 하면서 무능하다고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글의 에텔레드와 비교해보면 살아남은 나라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텔레드 | 선조 | |
신하들이 싸우고 있었는가 | O | O |
전쟁에 대비를 했는가 |
O | O |
군대 내부에 문제가 생겼는가 |
O | X |
군대가 적에 맞서 싸웠는가 |
X | O |
나라를 버리고 도망쳤는가 |
O | O |
나라를 지키는 데 성공했는가 | X | O |
'역사 > 서양 중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윌리엄 이야기 2 - 북방인들은 왜 배에 올랐나 (0) | 2023.08.15 |
---|---|
윌리엄 이야기 - 1 (0) | 2023.07.15 |
전편의 내용처럼 북방인들이 노르망디를 정복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통일된 정치체제를 갖췄던 덕이 컸다.
[10~11세기 덴마크왕국 영토]
서로 분쟁이 없어지고 개발할 곳도 없으니 외부로 눈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왜 그들은 머나먼 프랑스땅까지 가게 되었을까?
몇 가지 이유를 함께 살펴보자.
1. 농사가 힘든 땅
북방인들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 위도가 약 20도 이상 높은 굉장히 추운 지방에 살았다.
농사가 잘 안 되니까 낚시와 사냥이 발달했고
겨울에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고기나 물고기 말려먹는 데도 도가 텄다.
유사제품으로 우리들에게 익숙한 옆동네 스웨덴의 화학병기도 있다.
이런 건조고기의 장점은 냉장고 없이 던져놔도 오랫동안 안 상한다는 점이다.
북방인들은 고기통을 싣고서 일찍부터 여기저기 쏘다니고 있었다.
(가는 길에 먹고 남은 빈 통에 털어온 곡물을 채우면 되니까 재활용도 잘했다)
2. 얼어붙은 동쪽과 북쪽의 바다
북방 바다엔 항해의 근본적인 제약이 있었으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바다가 겨울에 얼어버린다.
그래서 타이밍 잘못 잡으면 다음 여름까지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든지 여기저기 다 털어내든지 해야한다...
그렇다고 북쪽으로 가자니 해안선이 다 얼어버려서 북극가서 얼어죽기 딱 좋았다.
물론 이 글을 쓰는 2023년엔 안 어니까 배 타고 다니기에 세상 참 좋아졌다.
3. 남쪽의 동프랑크 왕국
중세 시스템 상 약한 애들 대충 털어도 왕이 바로 구하러 오긴 힘들었지만,
대놓고 붙어있는 나라를 치면 언젠가 보복당하기 딱 좋았다.
구실을 제공해버리기 때문에, 묵혀뒀다가 정복하고 싶을 때 써먹으면 됐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에 붙어있는 (왼쪽부터)
로타링기아, 동프랑크왕국, 폴란드왕국은 좀;;; 무서워서 못 때렸다.
4. 분열된 잉글랜드와 프랑스
영국은 나름대로 같은 왕국으로서의 인식도 있었고
왕이 힘도 어느정도 있었으나
귀족들의 경쟁이 너무 치열한 상황이었고
프랑스는 지도처럼 왕이 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게다가 둘 다 나라가 상당히 넓다 보니,
어디 공격당했다 그래서 영주들한테 군대 빌려다가 달려가면
이미 다 불타고 북방인들은 도망치고 없었다 -_-;
5. 항해술과 거점
북방인들은 여기저기 쏘다니다보니 뱃길이나 바람, 해류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그 덕분에 사람이 없는 섬 여기저기에 거점을 구축했다.
덕분에 브리튼 제도 주변에 배를 대고 쉴 수 있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던 것은
바람이 서쪽으로 불면 서쪽섬에 가서 쉬고
북쪽으로 불면 북쪽섬에 가서 쉬고
동쪽으로 불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됐다.
이외에도 여러 요소로 인해 북방인들이 프랑스에 놀러왔다 노르망디에 눌러앉게 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북방인들은 점차 잉글랜드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역사 > 서양 중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윌리엄 이야기 3 - 한편 영국에서는 (0) | 2023.08.21 |
---|---|
윌리엄 이야기 - 1 (0) | 2023.07.15 |
최근 카드 발급을 하며 실험한 결과, 요즘은 앱카드가 등록되기 때문에 발급신청과 동시에 기간이 시작된다...
옛날처럼 배송기간 고려해서 월말에 신청하면 실적기간만 손해를 보니 카드는 매월 1일에 발급하는 게 유리한 것 같다.
농민: 아이고 먹고 살기 힘들다
바이킹: 가족들이 굶고 있습니다. 먹을 것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농민: 왠 거지들이야. 우리 먹을 것도 없어요~
바이킹: 없으면 가서 만들어야지
농민: 만들어 올 게 없다니까?
바이킹: '가서' '만들라니까'?
농민: ???
프랑스군 장교: 다 어디갔대냐?
8세기 이래 대해적 시대를 맞이한 북유럽.
해안 마을은 바이킹들의 깜짝 방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서프랑키아 왕의 고심은 더욱 깊었는데,
해가 갈수록 각지에서 힘을 키운 영주에 대한 통제력은 잃고
사방의 강대국으로부터의 위협이 커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놀러온 바이킹들을 혼내준
서프랑키아의 왕 단순이 샤를은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순이 샤를: 헉헉, 힘들어 죽겠네. 얘들 내년에 또 오겠지?
신하: 폐하, 제가 아주 묘책을 떠올렸습니다.
단순이 샤를: 힘들어 죽겠는데 또 뭐 할라고
신하: 저들을 그냥 쫓아내는 게 아니라 여기 아주 눌러살 게 하는 겁니다!
단순이 샤를: 너도 계속 싸우다가 결국 맛이 갔구나.
야만인들한테 아주 약탈 하이패스를 주자고?
신하: 아니죠 아니죠. 어차피 쟤들이 다 불태워 놓은 거
매번 구해준다고 군대 끌어오니 우리 농사만 망하지 않습니까
이럴 바엔 쟤들이 알아서 복구도 하고 관리도 하고 국방도 맡으란 거죠
단순이 샤를: 오....! 북쪽을 자동관리하는 시스템이로구만
신하: 바로 그겁니다. 어차피 세금도 못 걷을 정도로 황폐화된 거
이렇게라도 하자는 거죠
단순이 샤를: 얼른 만나러 가보자고
롤로: (편지를 읽고) 안 그래도 남부 놈들 요새 성인지 뭔지 성가신 것도 만들고
언제 왔는지 성에 군인도 채워놓는단 말이지...
빈 손으로 돌아가느니 따뜻한 곳에서 농사나 짓는 게 이득일지도 모른다.
롤로: 도장 찍읍시다 마
그렇게 서프랑키아는 북방 땅 일부를 롤로노아해적단에 넘겨주고
'북방인들의 땅', Nor-man-dy 라고 부르게 된다.
호전적인 북방인들에 의해 이 땅이 혼돈의 카오스가 될 거란 우려와 달리
지도층이 불어도 배우고 가톨릭으로 개종도 하면서 서서히 섞여들었고
부하들도 자연스레 프랑크인들과 가족을 꾸리며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 나갔다.
물론, 주변 줘패고 땅문서 뜯어오는 버릇은 끝내 고치지 못했다.
샤를은 분명 빗금친 부분만 주기로 했는데, 정신차려 보니 선이 새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역사 > 서양 중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윌리엄 이야기 3 - 한편 영국에서는 (0) | 2023.08.21 |
---|---|
윌리엄 이야기 2 - 북방인들은 왜 배에 올랐나 (0) | 2023.08.15 |
역사를 읽다 보면 아마 나라를 표현하는 여러가지 표현을 보셨을 겁니다: 국가, 나라, 제국, 민족 국가로 대표되는 그런 것들이요. 이 글에서는 그런 표현들을 간단히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선, 근현대는 서양이 앞서나가고 있기 때문에 용어가 그들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새로운 사상이나 국가관을 형성할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용어를 하나씩 붙여왔고, 그 뒤를 따르던 일본이 한자어로 옮긴 것을 우리들이 다시 한국어로 읽고있는 셈이죠. 위의 예시 중에 제국은 우리도 왕국보다 상위 개념으로 이미 썼는데? 하시는 분들도 계실 건데 그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통적으로 말하던 제국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하는데, 이 때문에 현대에서 말하는 제국을 이해하는 데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본론으로 가서 요즘 역사책에 나오는 나라는 대개 영어로 Country, State, Nation, Empire 정도로 표현이 가능할 겁니다. 이 중에 Country와 State는 그 의미가 거의 같고 우리가 흔히 쓰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미국 같은 경우 영어로 United States of America 라고 쓰는데, 이는 아메리카에 있는 50개 나라의 연합이란 뜻입니다. 다만, 이 명칭의 경우 문자 그대로 50개 나라가 뭉쳐서 미국을 형성했다라기보다는 공화국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명칭을 채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자로는 미국의 주를 쓸 때 州(고을 주)자를 쓰는데 영어권의 의미도 저런 느낌으로 보시면 될 듯 합니다.
다음으로 Nation의 경우에는 엄밀히 번역하자면 '민족 국가' 정도 되겠습니다. 이 개념은 19세기 정도나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근대 제국주의 시기에 저절로 발생하면서 독립운동의 동기가 되었다.'라는 것은 허구입니다. 실상은 제국들 간의 경쟁에서 상대 제국 내부에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을 위한 명분이나 승리했을 때 상대를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민족이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한다는 이념)가 조선에 적용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다만 개념 자체는 점점 대중에 정착되면서 동일한 민족을 가진 사람들이 세운 나라로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같은 하나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민족 국가나 Nation으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Empire는 제국으로 번역됩니다만 역시 엄밀히 번역하자면 '정복 국가' 정도 됩니다. 이 개념은 라틴어의 Imperium에서 파생된 단어 가운데 하나이며 Imperium이라는 단어가 지금 개념으로 행정지역 정도 됩니다. 즉, 행정지역을 계속해서 늘려나가는 국가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지요. 물론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저 용어가 탄생하긴 했습니다만 근본적으로는 식민지든 영토든 보호령이든 계속해서 행정지역을 늘려갔던 나라들은 모두 영어로는 Empire, 한국어로는 제국이라고 번역해서 부르고 있지요. 아마 편의상 황제가 왕들을 거느렸으니 거기서 착안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아마 많은 분들이 전투가 일어난 테르모필라이보다는 영화 300으로 더 잘 알고 계실 전투입니다.
이 전투가 일어나기 약 15년 전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홧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1세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내부(중앙집권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땅이 너무 넓어서 심심하면 터졌습니다)의 반란을 정리하고 그리스 놈들한테 복수하려고 이를 바득바득 갑니다. 그래서 본토에 대한 경고장 느낌으로 소아시아 (오늘의 터키) 서해안의 그리스 식민지들을 모조리 쓸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리스 전역의 각국에 사절을 보냅니다. 이것이 유명한 '물과 흙을 바치면 평화롭게 공존할 것이다.' 라는 문구입니다. 문명의 최전선이라 불리던 마케도니아마저 굴복시킨 페르시아의 이 요구는 절반 이상의 그리스 도시들에 의해 받아들여집니다. 마라톤 전투 이후로 그리스 주도국으로 군림하던 아테네는 완전히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도 항복하자니 체면이 안 서고 저 놈 저거 또 오면 막아낼 자신은 없거든요. 이렇게 고민하던 그 때, 스파르타에서 멋있는 행동을 선수 쳐버립니다. 사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을 뎅강하고 잘라버린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신을 죽이는 건 극도로 무례한 행위라 그냥 '뜨자'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테네도 덩달아 사신을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기타 힘 좀 있다 싶은 도시들도 주도권을 잡을 마지막 찬스라는 생각에 사신을 그냥 보냅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사신들로부터 소식을 듣고 살생부를 작성합니다. 특히, 스파르타는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남기고 모조리 죽이고 노예로 팔아주겠다고 단단히 벼르죠. 이렇게 서방 역사상 첫 백만대군이 출발합니다. (실제로는 30만~60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당시엔 보스포루스 다리가 없어서 해협을 배로 건너야 했는데, 통 큰 크세르크세스는 배를 연결해서 물에 뜨는 다리를 제작합니다. 그리고는 해안선을 따라서 아테네를 향해 직진하죠. 그렇게 페르시아 -> 마케도니아 -> 항복한 그리스국가들을 거쳐 남부로 들어가는 길목인 테르모필라이에 진입하게 됩니다. (해군도 보급을 위해 해안선을 따라서 함께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곳에서 그리스군과 조우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를 필두로 약 7천명의 그리스인이 모인 이 연합군은 '여기 뚫리면 끝장이다.'라는 생각 하나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검은색 빗금은 대략적인 오늘날 간척지를 표시해둔 것인데, 당시에 정확히 어느 정도 너비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원지도 출처 : Google Maps)
실제로 지도에 나와있듯이 길목이 매우 좁았고 바로 옆에 섬이 하나 있어서 바닷길도 상당히 좁았습니다. (옛날엔 나침반, 정교한 지도 같은 게 없어서 현대 지도로 짧고 뭐고 간에 주변에 땅 안 보이기 시작하면 선원들이 겁에 질렸습니다 그러다보니 땅 근처에서 항해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300명이 보내진 걸로 알려졌는데 왕실 근위대의 수와 일치하고, 이는 몰살을 각오하고 레오니다스와 근위대만 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병력을 다 내보냈다가는 노예 민족인 헬롯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싸움부분에 들어가기 전에 짧게 고대 전쟁을 설명하자면, 당시는 머릿수로 밀어붙여서 적이 도망치면 이기는 게 전쟁이었습니다. 다만 그리스와 페르시아 군인의 차이점은 // 그리스는 돈 좀 있는 '시민'이 자기 돈으로 장비 왕창 사서 훈련도 빵빵하게 받은 뒤에 팔랑크스라고 불리는 방패와 방패를 맞닿고 가만히 서서 앞으로 걸어나가는 전술을 취했고 // 페르시아는 나라에서 농민들을 왕창 모아다가 창 한 자루 씩만 쥐어주고 방패나 갑옷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기에 나뭇가지를 엮은 방패와 평소 입던 옷을 챙겨서 전장에 우루루 몰려나갔습니다. 다시 말해, 질 vs 양의 대결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그리스 창에는 페르시아 방패와 갑옷이 다 뚫리고 페르시아 창,화살에는 그리스 방패는 커녕 갑옷의 얇은 부분도 안 뚫려서 전투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안 그래도 방패의 벽, 팔랑크스에 막혀서 찌를 만한 데도 별로 없는데 틈새 부분은 죄다 갑옷으로 덮여있으니 속수무책이었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모탈이라고 불리던 중보병도 투입했는데, 영화처럼 얼굴에서 입김 뿜고 그런 부대였으면 혹시 몰랐겠지만 아니었기에 이들의 장비로도 감당이 안 됐습니다. 이렇게 장비와 훈련으로 다져진 그리스 군은 이틀 간은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바다에서는 오히려 당시 아테네가 바다의 왕자라 다 이기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3일 째에 에피알테스라는 배신자가 (이 인간 하나 때문에 집안 전체가 그리스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배신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큰 돈을 받고 비밀 통로를 알려줍니다. 이 쪽으로 2만 명의 별동대가 오니까 (이틀간 죽어나갔는데도 별동대 숫자가 그리스군보다 3배 많은 건 넘어갑시다) 여길 지키던 소수의 그리스군이 숫자에 기겁해서 도망쳐 옵니다. 총사령관 레오니다스는 회의를 열고 일부가 시간을 끄는 동안 나머지 군대는 후퇴해서 정비하자는 안을 냅니다. (지금 모인 병력이 대부분의 정규병력이라 여기서 잃을 수 없었습니다)
(출처 : Pinterest)
회의 후, 스파르타300, 테스피아700, 테베400인 만이 남아서 페르시아의 발목을 붙들고 마지막까지 싸웁니다. 하지만 위의 사진에 나와있듯이 팔랑크스는 오직 정면의 적과 싸우는 데에 특화되어 있어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페르시아 군 손에 하나 둘씩 죽어나갑니다. 전투가 한창일 때 레오니다스는 결국 전사했으나 스파르타인들이 '왕을 지켜라' 라고 일제히 외치면서 그 절망적인 와중에 시체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날이 가기 전에 1400명은 전멸했고 페르시아는 계속해서 남하합니다. 영화나 현실이나 엄청나게 극적이고 멋있지만, 실제론 3일 만에 방어선이 뚫려버렸으니 페르시아가 병력 피해를 조금 더 봤을 뿐 그리스의 대패였습니다.
하지만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을 걸 알면서 싸우러 나간다는 이 행위는 이후 2500년간 전세계 사람들의, 농담삼아 국뽕용 향신료로 쓰여왔고 아직도 스파르타의 전사들을 역사상 가장 용맹한 군인 가운데 하나로 기억하게 했습니다. 비록 패배했을지라도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이 때 아테네는 패배 소식을 듣고, 도시를 비우고 펠로폰네소스로 시민들을 대피시키는데 페르시아군이 아주 신나게 잘 약탈했습니다.
여담으로 사실 일부가 테르모필라이에서 살아남긴 했으며 스파르타인도 3명이 살아남았습니다. 에우리투스, 아리스토데무스, 판티테스가 그들의 이름입니다. 그 중 에우리투스와 아리스토데무스는 전투 전에 눈병에 걸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후방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에우리투스는 고집을 부려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데무스는 평생을 겁쟁이라고 국민 전체에게 멸시를 당했으며, 전장에서 싸우다 죽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합니다.
판티테스는 레오니다스의 명으로 잠시 테살리에 파발로 갔다가 제 시간에 전장에 돌아가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판티테스도 겁쟁이라고 멸시했으며 그는 목 매달아 자살했다고 합니다. 슬픈 의미에서는 결국 300명이 모조리 죽은 것이 맞는 것도 같습니다.
'역사 > 서양 고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랑크스 (Phalanx) (0) | 2017.11.08 |
---|---|
스파르타식 교육 아고개 (Agōgē) (0) | 2017.09.06 |
팔랑크스는 고대 그리스나 마케도니아에서 사용되었던 진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단은 진법에 앞서서 그리스 군인들이 입었던 장비에 대해 알아야 할 텐데요. 위의 사진에 나와있는 나무방패(+청동조금), 청동갑옷(풀셋은 파노플리라고 부릅니다) + 두 번째 사진의 창(도리or도루)가 규격 장비였습니다. 다만, 어깨와 팔뚝 갑옷, 허벅지와 발목 갑옷은 비용 문제로 매우 드물었습니다. 또한 나라마다 국가에서 장비를 지급하는 경우와 개인이 구매해서 충당하는 경우로 달랐는데 스파르타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유지보수까지 모두 개인이 충당하게 했습니다. 돈 문제 때문에 자연스럽게 당시 군인은 시민+중산층 이상이라는 조건이 붙는 일종의 명예직이 되었습니다. (이기면 약탈이 허용되었으니 오직 명예만 보고 참가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여담으로 말은 나중에 다루겠지만 외제차 가격이었습니다. 때문에 '고대 전쟁에서 말이 있다 = 귀족' 으로 봐도 대부분 무방합니다.
장비에 대한 설명을 조금 붙이자면 방패의 이름은 호플론이었고(여기서 호플리테스라는 중보병의 명칭이 등장합니다) 크기는 1M 정도였지만 당시의 작은 신장을 고려하면 얼굴~무릎까지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창은 도루라고 불렸는데 꼬리 부분에 사우로테르라는 이름의 찌를 수 있는 날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용도는 바닥에 꽂고, 오른팔 좀 쉬거나 뒤로 안 밀리게 버티는 것, 밀고 나가면서 쓰러져 있는 적의 확인 사살, 앞부분이 부러졌을 때의 보조 무기 정도였습니다. 칼은 크시포스라고 불렸으며 오늘날 주방에 있는 식칼 정도 길이에서 그 2~3배 정도까지 국가별로 다양했습니다. 애초에 이걸 쓰는 상황이면 진형이 무너졌다는 것이고, 그 뜻은 완패 혹은 완승이라 쓸 일은 별로 없었을 테지만요. 이전 문단에 돈 문제라고 언급했지만, 허벅지나 팔 쪽의 갑옷을 입지 않았던 또다른 이유는 방패로 막히는 데 굳이 그 비용을 들여봐야 사실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 아무튼 이런 장비를 갖춘 호플리테스들이 훈련을 받고 나면 위의 그림과 같은 멋진 팔랑크스진을 짤 수 있었습니다. 고증화라서 약간 왜곡이 있는데, 실제로는 뒷줄에서 방패를 왼쪽으로 든 게 아니라 앞으로 들고 동료를 밀어줬습니다.
영화 300이 이거 하나만큼은 그래도 꽤 열심히 고증을 했습니다. 방패가 눈에 띄고 판도 넓고 하니까 군인들이 각자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애초에 자기가 사는 거니까 튜닝 정도는 너무 어긋나지만 않으면 다 허용해줬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나라에서 공장식 생산으로 같은 것만 찍어냈습니다. 이렇게 같은 것만 찍어낸 공장식 생산이 효과를 본 게 역V자 마크가 그리스 알파벳으로 L인데 이것이 스파르타의 국명 Lakedaemon의 첫 글자라서 보기만 해도 적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기도 했다네요.
방패는 상당히 혁신적이었습니다. 왼팔을 가죽 끈 사이로 끼워넣고 끝 부분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들게 되어 있어 잘 놓치지 않는 설계인 데다가 그릇처럼 볼록해서 왼쪽 어깨에 건 채로 다녔다고 합니다. 무게가 7~10KG이상 이라고 하니 손으로만 들면 몇 분 싸우지도 못 했을 겁니다. 그런데 왼쪽 어깨에 건다는 부분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방패가 원형이다 보니 나의 왼쪽 절반, 동료의 오른쪽 절반을 가리게 되는데 (위는 투구와 갑옷이 가려주고 아래는 사람이 너무 빽빽해서 찌를 정도로 팔을 뻗을 수가 없었습니다) 왼쪽에서부터 가려주면서 차근차근 정렬하면 그럼 가장 오른쪽 사람은? 네, 그대로 몸을 드러낸 채로 싸웠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팔랑크스의 가장 오른쪽 줄은 그 나라에서 가장 잘 싸우고 오래 살아남은 베테랑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반면에 왼쪽은 몸이 완전히 가려지니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로 채웠구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숙련도의 차이 때문에 실제로는 오른쪽이 전투를 리드했습니다. 베테랑은 창을 창으로 막고 찌르고를 하는데 신병들은 방패 뒤로 숨기에 급급해서 서로 오른쪽이 왼쪽을 점점 밀어내는 형태로 갔다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일부 줄이 무너져 도망치면 그 균열에서부터 주변이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앞이 비게 된 부대가 적의 측면을 후려쳐서 전체를 무너뜨렸습니다. 위의 그림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오늘날의 인식과 다른 점은, 갑옷이 튼튼하고 애초에 줄다리기랑 비슷한 원리로 싸우는 거라 패배해도 큰 피해가 없어서 다시 덤비고 다시 덤비고 하는 게 이론적으론 가능했습니다. 물론 이미 졌던 기억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나서 점점 더 빨리 무너졌을 겁니다.
실제 전쟁을 상상해 보시면 대략 감이 오시겠지만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 체력전이었습니다. 부딪힌 사람들끼리 서로 방패로 밀고, 뒤에서도 밀리지 않으려고 앞사람 갑옷에 대고 방패로 밀고, 옆과 이어진 방패의 벽이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에 서로 악착같이 줄도 지키면서, 그 와중에 오른팔 들어서 창으로 찌르고, 방패 나무부분에 꽂히거나 부러지면 손목을 돌려서 뒷부분으로 다시 찌르고, 그것도 없어지면 뒷줄에서 창 받아서 찌르고 (창길이가 2.5M라 앞의 두 줄만 공격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수염이랑 머리채 잡아당기고, 저~ 뒤에선 돌 주워서 던지고 했답니다.
결론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 덩어리식 전술이었고 가장 약한 줄이 곧 그 군대의 실질적인 힘이었기에 훈련의 강도가 다른 국가에 비해 매우 빡셀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위의 노란색 그림의 제일 뒤에 나팔을 불고 있는 사람은 일종의 지휘관인데 제대로 밀고 있는지 확인하고, 격려하고, 도망 못 가게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결국 아무리 훈련을 해도 전장에선 도망가는 사람이 나왔다는 뜻이겠죠.
실제 전장에서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증명되었듯이 장비가 차이나는 군대와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했으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보조 병력과의 조합도 완성됩니다 // 전후방엔 투창병과 궁수 - 전방에서 몇 차례 사격 후 팔랑크스의 뒤로 돌아가 후방에서 지원사격, 중앙엔 팔랑크스, 양 날개에 기마대
그러나 오직 전진만을 위한 보병의 장비, 훈련 때문에 측면과 후방이 치명적으로 약하다는 단점을 보완해주던 기마대와 보조 부대가, 이후 비용 문제로 점차 축소되면서 서방에서 불세출의 명장 한니발에게 뿌리 깊은 영감을 받은 로마군에 의해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싸울 수 있다는 이 진형의 원리 자체는 근대에 기관총이 개발되기 직전까지 오랜시간 이어집니다.
출처는 제 상상, 구글링, 영문위키, 플루타르크 영웅전입니다.
'역사 > 서양 고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르모필라이 전투 (Battle of Thermopylae) (0) | 2017.12.13 |
---|---|
스파르타식 교육 아고개 (Agōgē) (0) | 2017.09.06 |
" target="_blank" class="tx-link">
한 때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 인사이드 아웃입니다.
까칠 공포 즐거움 슬픔 분노
한 사람 안에는 위와 같은 다섯가지 감정들이 함께 살면서 몸을 조종한다는 참신한 내용이었죠.
그 외에도 사진의 빙봉 같은 상상친구나 기억 관련한 업무를 맡고 있는 여러 직원들도 나오는 등,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대한 공장/도시처럼 표현한 것도 섬세하게 잘 되어 있습니다.
저렇게 생긴 조종석(?) 같은 걸로 감정을 분출하는 데 사진처럼 다들 이름값을 아~주 잘 해서 누가 언제 잡느냐에 따라 바깥에 분출되는 감정을 구경하는 것도 감상 포인트입니다.
물론, 즐거움이 너무 즐겁게 살다가 즐거움에 취한 덕분에 즐거운 스토리라인이 시작되는데... 이 부분의 진행과 해소가 정말 커다란 주제로 다가오는 것 같아 살면서 한 번쯤은 꼭 봐야 하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츠 (GANTZ, 2011) (0) | 2017.10.09 |
---|
경제적인 얘기부터 조금 하고자 합니다.
중국은 최근 30년 간의 급속한 경제성장 이후로 현재는 인건비와 지대 등의 상승으로 인해 기존의 1,2차 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더이상 지탱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프에 나온 최근 10년 사이만 해도 굉장한 수준의 임금 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보다 과거에는 Made in China라는 명성에 걸맞는 값싼 노동력이 존재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10,000 위안은 한화로 현재 약 168만원의 가치가 있는데, 그래프에 따르면 2006년 제조업 근로자의 연봉은 340만원 수준이었으나 2016년에는 1000만원을 넘겨 10년 사이 3배 가까이 폭증했습니다. 지대나 공장 임대료도 이러한 상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했으며 제곱미터당 몇백원 수준에 불과하던 임대료는 2010년 기준으로 주요 해안의 경우 3000원을 넘겼습니다. 그 외에 운송료, 세금, 재료비 등을 고려해보면 중국의 제조업은 가격경쟁력을 거의 상실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16년 기준으로 약 196만원 수준의 연봉을 받아간 베트남 노동자를 떠올려보면 이러한 짐작을 쉽게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중국 당국 또한 이러한 현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기에 서부내륙으로의 공장 이전과 첨단 산업으로의 적극적인 도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만 현재 제조업 수준의 경제적 역량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로 실효성을 거두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가득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여전히 낮은 임금과 지대, 가까운 원료 산지라는 강력한 이점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수출항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가는 길이 산과 비포장도로 투성이입니다. 대표적인 내륙도시인 청두시나 충칭시는 컨테이너당 운송료만 100만원에 육박합니다. 임금과 지대가 동부 해안에 비해 월등히 싸다 해도 운송비가 그 이익을 상쇄시켜버리는 셈인 것입니다. 물론, 정부 차원에서 철도 신설에 자본과 노력을 엄청나게 쏟고 있으니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중국 기업들이 이미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지로 빠른 속도로 이주하고 있긴 합니다만)
후자의 첨단산업은 성장세나 잠재력이 굉장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제'에 대한 선입견이 한계선을 이미 그어버렸다고 봅니다. 대표적으로 휴대전자기기를 떠올려 봅시다. 그 누구도 샤오미와 고급이란 이미지를 연관시키지 않으며 언제나 '값싼, 가성비' 따위의 중국산 그림자가 따라다닙니다. 심지어 중국인들조차도 아이폰이나 삼성을 들고 다니는 것을 더 앞서나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박리다매 정책으로부터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는 셈입니다. 물론, 이쪽도 마찬가지로 정부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업이고 거대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성장 중이니만큼 앞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의 상해복합지수 파동과 같은 불안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으니 내부적으로 투자가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일 겁니다. 중국에 대한 해외투자도 년단위로 보았을 때 증가와 감소를 오락가락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약 70퍼센트가 홍콩발 투자임을 감안할 때, 이는 더이상 중국이 외국인들에게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투자 감소는 자연스레 경기의 지표라 불리는 건설업에 타격을 가져왔던 것으로 보이며 남중국 모닝포스트의 기사에 따르면 2030년까지 건설업의 침체가 이어질 것 같다하니 전망 또한 매우 어둡습니다.
이러한 경기부양이 최우선시되는 상황에서 시진핑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는 지금까지 쌓아둔 자본을 활용하여 경제적인 중화제국의 건설에 착수하기 시작합니다. 2013년 말 중국은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의 설립을 제안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으며 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AIIB,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가 설립됩니다. 이 은행의 자본은 약 3/4이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에서 오고있으며 중국은 주최국이자 최대주주로서 투자결정 등의 정책 수행에 있어 26%퍼센트의 표결권을 가져갑니다. (여담으로 한국은 3.5% 정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압도적인 표결권은 정치적으로 좋든 싫든 영향력이 생길 수 밖에 없게 되는데, 특정 지역에 돈을 몰아빌려주거나 거부하는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이 개발을 위해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했을 때 중국 하나의 반대가 2-7위(인도, 러시아, 독일, 한국, 호주, 프랑스)를 합친 것과 맞먹기에 현실적으로 거절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식입니다. 이 은행에 미국과 일본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는 미국 중심의 경제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시진핑은 1년 후인 2014년 11월에 실크로드 펀드라는 것을 만들었으며 이 4조원 규모의 펀드의 목적은 순수하게 인프라시설이 부족한 아시아 지역국가들의 인프라건설에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중국이 원하는 지역에 투자할 수 있는 자국 자본으로 이루어진 펀드이니만큼 주변 약소국들은 더욱 중국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군사력으로 주변국을 압박한 러시아의 정책과는 반대로 압도적인 자금력을 동원해 주변국의 반발을 최소화한 상태로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중국은 최근 10년간 아프리카에서 이러한 투자를 통해 재미를 본 바 있습니다. 투자에 대한 대가로 석유를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시 2013년 말로 돌아가서, 시진핑은 인프라투자은행 설립을 제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전을 하나 제시합니다. 바로 '일대일로' 정책입니다. 뜻풀이를 하면 하나의 구역, 하나의 길이란 뜻으로 21세기판 실크로드를 만들어 동유럽-러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하나의 경제벨트로 묶고자 하는 정책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중국을 중심으로 여섯개의 육로와 하나의 바닷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대놓고 미국 중심의 경제질서에 대한 도전을 선언한 셈입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꼈는지 오바마 정권 말인 2015년에 미국이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에 가입했었습니다만 2017년 1월에 트럼프가 도로 탈퇴해 버렸습니다. 한편 이 일대일로라는 정책에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하나의 단체에 회원국들이 가입하는 식이 아니라 중국과 각각의 주변국이 별도의 협상을 맺는 식입니다. 자연스럽게 모든 참여국에 대해 중국이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라면 21세기 실크로드가 아니라 21세기 조공무역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시듯이 요즘 사이 안 좋은 한국이랑 일본은 쏙 빼놨습니다.
결국 인프라투자은행과 실크로드 펀드 등으로 중국과 주변국을 잇는 거대한 연결망을 형성하고 일대일로 정책을 통해 노동공급시장과 소비시장을 확보하는 것이 중국의 목표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한미일, 서유럽이 연결망에서 배제된 것은 자국 제품의 상대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함일 겁니다. 그러므로 인도는 중국 입장에서는 도저히 놓치기가 아쉬운 황금알 낳는 거위이고, 인도도 그걸 잘 알기에 버티고 있는 것일 테고요.
트럼프가 세상을 뒤집어 버리겠다는 식으로 엄포만 놓고 있을 때 중국은 이러한 경제적 준비를 해왔었고 한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이 아닌 동남아나 중앙아시아 쪽의 약소국들은 자국의 실리를 챙기기 위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왔을 겁니다. 또한 남중국해 분쟁이나 시킴 지역 분쟁은 모두 이러한 국제 질서의 재편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위력 과시이자 향후 일대일로 정책에 걸림돌이 될만한 부분을 미리 정리해두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베트남의 쩐다이꽝 주석이나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모두 반중 친미 노선을 타고 있으니 미국과 깊은 협력 관계를 형성하기 전에 처리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기도 합니다. 현재 베트남은 가스 탐사중단을 통해 중국에게 한 수 접어둔 상태이지만 인도는 국력이 국력이니만큼 어디까지 분쟁이 격화될지가 앞으로의 중국의 행보에 큰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과 실크로드 펀드 및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대외 경제정책의 성공, 베트남에 대한 외교 승리로 중국이 무섭게 달려나가는 급박한 상황이지만 중국에 맞설만한 역량을 가진 한미 양국은 연일 이어지는 북한의 무차별 도발에 대처하는 데 급급하여 먼 타국의 일까지 주시하고 있을 수 없는 실정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의 시험 미사일들이 자주 일본 영토 근처에 떨어지고 있으니 일본 또한 북한 문제를 처리해야 할 우선 과제로 안고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석유 공급은 적은 투자로 아주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알짜배기 상품이나 다름없습니다. 받아야 할 비난에 비해 조금만 받아도 라이벌들의 시선을 묶어둘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까다로운 국가들의 시선은 먼 동쪽에 묶어둔 채로 인도차이나반도 서편의 항구를 노리며 1962년을 재현시켜주겠다는 중국과 그 날의 복수를 꿈꾸며 제2의 노동강국을 꿈꾸는 인도의 건곤일척의 승부가 예정되어있는 지금, 이 분쟁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조용히 끝날지 중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제 질서가 우뚝 서는 계기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식으로든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국제질서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정치 > 아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웅산 수지의 딜레마 (0) | 2017.09.25 |
---|
세월만큼이나 흘러가버린 유머코드
'영화 > 한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상륙작전 (2016) (0) | 2017.10.09 |
---|---|
갓 오브 이집트 (Gods of Egypt, 2016) (0) | 2017.09.27 |
왜군은 다시 한 번 기세 좋게 아랫지도의 노란 길을 따라 밀고 올라갑니다. 전라도 교통의 요지인 남원성을 뚫고 전라도를 휩쓸고 다니면서 지금의 천안인 직산까지 쾌속 진격합니다. 호남평야의 입구로, 곡창지대의 관문이라 불리던 전주성의 수비병력은 어김없이 죄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명군의 활약으로 한양을 앞둔 최후의 길목인 직산에서 왜군은 발목이 잡히고 맙니다. 이제 겨울은 다가오고 은은히 풍겨오는 명량의 바닷내음에... (왜군 입장에선 그놈의 이순신이겠죠) 때마침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왜군은 이대로는 살아서 못 나가겠다 싶어서 왔던 길 그대로 재빨리 되돌아 나갑니다.
부랴부랴 항구에 도착해서 배타고 나가려니까 또 그놈의 이순신이 전라남도 순천왜성에 주둔 중이던 고니시를 개박살냈다는 비보를 접합니다. 당시 항해술로 순천에서 일본으로 대규모 함대가 직항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부산 - 대마도 - 일본 루트를 거쳐야 했기에, 고니시를 구하려고 부산으로부터 약 500척의 함선에 60,000여 명의 병력이 순천항으로 서둘러 달려갑니다. 이순신은 노란 x가 된 곳 근처에 명군을 숨겨두고 그들을 슬쩍 보내줬습니다. 그러다 여수 오른쪽의 좁은 곳으로 왜 수군이 들어오자마자 앞길을 막고는 대포알을 종류별로 대접합니다. 그 놈의 이순신.. 그 놈의 이순신!!! 하며 왜군은 이순신의 대장선 (어떻게 알아보았냐하면 동서양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가장 크고 화려한 배에 대장이 탔습니다) 에만 집중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추가로 조선군의 뒤에선 고니시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고, 왜군의 뒤에선 명군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치며 바다 위에 온갖 군함들이 엉겨붙어 난전을 새벽부터 수시간동안 이어갑니다. 200척 가까이가 완파되고 그와 비슷한 수가 더 이상 배로 기능할 수 없게 된 왜군은 약 150척만이 살아남아서 부산쪽인, 명군이 있는 방향을 악착같이 뚫고 도주합니다. 그걸 또 그 놈의, 그 놈의 이순신이 뒤쫓아오면서 하나 둘씩 계속 까부숴 버렸습니다. 결국 점심 때까지 이어진 추격전에서 10%도 안 되는 약 50척 만이 무사히 노량을 빠져나갔으며 조명 연합군은 100척 이상의 적선을 나포하고 근 400척 가까이를 격파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명 수군 제독 진린이 기뻐하며 이순신의 대장선에 뛰어올랐을 때, 장군은 이미 방패의 벽 안에서 '전투가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이 사실을 안 진린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주저 앉아서는 목 놓아 통곡했다고 합니다. ㅠ.ㅠ 일반 병사들이 울고불고 한 것은 이루말할 것도 없었죠. 심지어는 '장군님마저 가시면 이제 저희는 누가 지켜주신단 말입니까!' 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이게 왕보다 장군을 우선하는 뉘앙스라 까딱하면 목 잘리는 대사입니다. 그 정도로 큰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뜻이겠지만요.
진린이란 장수를 간략히 소개하고 넘어가자면 공적과 재물을 탐하고 능력은 그리 우수하지 않았던 자인지라 (명나라판 원균 떠올리시면 쉬울 듯 합니다) 이순신을 처음엔 시샘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왜적을 잡아놓고 그걸 명 수군의 공으로 보고하고, 선물도 주고 하니 완전히 사생팬으로 변해선 하자는 건 다 하고 명령도 척척 잘 듣는 좋은 장군이 되었습니다. -ㅅ- 아무튼 흔히들 말하는 자기 배 부른 것 밖에 모르는 무능력이가 싸움에 열심히 참가하고, 공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 것을 보면 이순신이 사람 다루는 데도 참 대단했습니다.
이순신의 추격까지 더해지며 잃은 함선과 병력의 손실이 너무 컸던 탓인지 통일 일본은 다시는 조선을 침공할 엄두조차 못 냅니다. 아니. 멸망해버립니다. 말이 통일이지 히데요시 주도의 연합국가 개념이었는데 히데요시의 병력이 거의 몰살당해버렸으니 어쩌면 당연했을 겁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뤄보겠습니다.
그러나 조선 국토는 30%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황폐화되어 버렸으며 굶어 죽는 이가 속출하고 산 속에 숨어버린 자도 셀 수가 없는 지경이라 인구는 거의 절반 수준으로 추락해버렸습니다. 이어진 병자호란으로 치명상을 입은 조선은 동아시아의 강국에서 고래 사이의 등 터지는 새우로 빠르게 쇠퇴합니다. 일본은 이 시기 약탈 + 장인 납치 + 조선통신사 등등으로 중세 문화가 활짝 꽃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어받은 통일 왕국은 황금기를 구가합니다.
다들 잘 아시듯이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관해서는 의문이 꽤 있는 편인데 한산도에서 일점사를 그렇게 당해도 안 돌아가시던 분이 덜컥 추격 중에 돌아가셨으니 그런 의혹이 나올 만도 합니다. 유언만 겨우 남기고 사람이 즉사할 정도로 당시 해전에서 치명적인 총탄을 맞기가 매우 어려웠기도 하고요. 유명한 음모론 대로, 당시 조선 수군이 조총을 다량 확보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바로 옆의 군관에게 자신을 쏘아달라고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역사에 드물 정도로 나라를 끔찍이 사랑하신 분이셨으니 자신의 존재가 조선 왕조에 심대한 위협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당시 선조의 정통성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는 커녕 도망다니기 급급하고, 백성들에겐 성에 함께 남겠다고 공언하고서 혼자 빠져나가는 등 신뢰도가 아주 밑바닥인 데 반해서 이순신, 권율, 곽재우 등의 전설적인 영웅담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감지한 것인지 평양에서 한 때, 명나라의 실질적인 변방국이 되고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라는 천자의 명에 승낙의 뜻을 전하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심유경의 허풍외교 때문에 전쟁이 재개되면서 다행히도 무산되었는데 하마터면 300년 일찍 나라가 망할 뻔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후로 인간 불신적인 경향을 많이 보여줍니다. 유성룡도 강등시키고 이순신도 파직시키고 주변의 누구든 일단 의심해 버립니다. 심신이 하도 시달려서 어느 정도 안정기에 돌입하자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후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을 지지하던 유성룡은 유배되어 죽었고 이순신도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물론, 자신을 지지하던 기반은 선조에 의해 거의 초토화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선조의 책임이라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선대의 삽질이 유의미하게 영향을 끼쳤음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해신 이순신과 천리안 유성룡이 죽고 애국충정의 여러 의병장들도 헛되이 죽었으며 어린 시절 총명했던 선조는 의심병에 걸렸고 국토도 백성도 죄다 불타버린 슬픈 전쟁 임진왜란이었습니다.
'역사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진왜란 8 - 피란과 명의 개입, 행주대첩 (0) | 2017.10.06 |
---|---|
임진왜란 7 - 진주성 전투 (0) | 2017.09.04 |
임진왜란 6 - 명량대첩 (0) | 2017.08.31 |
임진왜란 5 - 한산도 대첩 (0) | 2017.08.28 |
임진왜란 4 - 칠천량 해전 (0) | 2017.08.27 |
특유의 입체적인 3D 그림체와 거침없는 묘사로 생존게임이라는 주제를 잘 표현해 호평을 받았던 일본 만화 간츠를 영화화한 물건입니다.
의상, 인물, 장비 같은 것들이 만화 원작 일본 영화치고는 그런데로 잘 고증되어 있어서 그런데로 볼만했던 것 같네요. 그래도 기왕이면 만화를 보는 게 차라리 나은 것 같기는 합니다.
굳이 길게 소개할 만한 영화도 아닌 것 같고, 시간 떼울 기회가 되면 한 번 쯤 보면 좋겠다? 정도의 영화입니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 2015) (0) | 2017.10.19 |
---|
실패한 제목을 만회하려는 듯한 이정재와 이범수의 연기배틀, 그리고 리암 니슨 한 토막.
'영화 > 한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007 북경특급 (國產凌凌漆, 1994) (0) | 2017.10.12 |
---|---|
갓 오브 이집트 (Gods of Egypt, 2016) (0) | 2017.09.27 |
때는 임진왜란 개전 초기, 부산 - 상주 - 탄금대에 이르는 방어선이 죄다 붕괴되고 한양까지 적이 들이닥치자 선조는 고민 끝에 평양으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적의 기세는 누그러들지를 않고 명의 원군도 언제 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조는 튼튼한 요새와 군사들이 있는 함경도 끝의 6진으로 도망가고자 합니다. 지도에 잘 보이실 지 모르겠지만 길이 멀기도 하고 험하기도 해서 피난지로는 적절했습니다. 그 때, 유성룡이 그걸 막아섭니다. 만약 거기까지도 왜적이 쫓아오면 야만인의 땅으로 피난을 가야 하는데, 그 위험한 길로 왕을 보낼 수도 없을 뿐더러 야만인에게 의탁하면 양반들이 뭐라 그러겠어요... 다시 말해, 여진족의 땅으로 넘어가는 순간 조선 왕조의 정통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선조는 마음을 돌려 명나라와 인접한 의주를 향해 피난을 갑니다. 선조의 왕비와 서열이 낮은 왕자는 6진으로 보냈습니다. 다행인지 위기인지, 한양 혹은 강원도에서부터 출발한 왜군에게 6진의 왕족들이 죄다 인질로 잡혀갑니다. 유성룡의 혜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무튼 의주로 가는 길에 펼쳐진 평야 지대의 곡식들이 각 고을의 관청에 쌓여 있었고, 일행은 간만에 배불리 먹으며 의주에 도착합니다.
한 편, 유성룡이 가는 길에 소를 어디선가 끌고 온 백성이 있어 고문을 해봤더니 왜군의 밀정이었습니다. (ㄷㄷ;; 여러모로 감각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때는 평양성까지 함락당한 상태였는데 붙잡은 밀정 덕분에 그 때나마 지역 곳곳의 조선인 첩자를 싹 색출해서 눈에 잘 띄는 시장에 목 매달아 버립니다. 때문에 의주까지 치고 올라오려던 왜군은 정보가 갑작스레 끊겨버렸고 명군이 이미 왔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급제동이 걸려버렵니다. (당시 명군이라는 존재는 지금의 미군보다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명의 사신 심유경이 슬그머니 혼자 와서는 "이보시게. 우리 명의 백만대군이 오고 있는데 맞설테요? 거 적당히 조공도 바치고 하면은 우리가 또 섭섭치 않게 대해줄 것인디..?" 하니까 회의하느라 성 안에 틀어박혀 버립니다. 여담으로 조선군이 쓰려고 모아놓은 식량이 평양성에 굉장히 많았는데 그 덕분인지 한동안 약탈도 하지 않았던 듯 합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던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손에 평양성을 빼앗기지만 벽제관에서는 명군을 막아내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집니다.
벽제관에서 왜군이 승리하면서 명군과 함께 한양을 협공하려던 권율은 행주 산성에서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바로 왼쪽에 한강이 흐르고 있어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절호의 기회에 각개격파를 노리고 공격해 온 왜군을 권율이 막아버렸습니다! 행주 산성은 상당히 조그마한 토성인데 평시엔 안 쓰고 위기시에 쓰는 성이라 관리도 안 되고, 안에 물자도 없고, 백성들도 살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조선군이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덜컥 이겨버린 것입니다. 번외로 행주치마 설화가 있습니다만은 성의 규모나 종류상 아무래도 허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간도 없는데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백성이고 양반이고 모조리 도망치던 거 고려하면 아무래도 여성까지 동원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당시 남자들 성격상 여자들에게 바깥일을 시켰을 가능성도 전무하고요.
아무튼 명군의 개입 + 심유경의 배짱외교 + 행주대첩 3연벙을 맞고 왜군은 부랴부랴 경상도로 후퇴합니다. 슬프게도 가는 길에는 조선군이 이미 궤멸되어 버렸던 지라 학살을 엄청나게 자행했습니다. 진짜 알아보기 싫을 정도로 너무 끔찍하더군요. 그 때문인지 몰라도 오묘하게 이 시기가 수많은 의병들이 일어난 때이기도 합니다. 전면전을 행한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게릴라로 후퇴하는 왜군을 집요하게 괴롭혀 댔습니다. 결국 지친 왜군은 (제 추측입니다만) 심유경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평화협상이 깔끔히 끝나길 원하게 됩니다. (지난 글의 진주성 대학살이 딱 이 시점입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땅 절반+명나라 선물을 요구해버립니다 (...) 거기에 심유경은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황제에게 '왜인이 조공국으로 받아만 준다면 물러간다 합니다.'라고 보고해 버립니다(...) 심유경은 나중에 보고가 거짓인 게 들통나서 머리가 잘려버립니다. 이렇게 평화협상이 애매하게 진행되는 동안 명나라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밍기적거리고 원균은 색시들이나 끼고 놀다가 칠천량에서 조선의 수군을 증발시켜 버리는데,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의 도화선이었습니다.
'역사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진왜란 9 - 정유재란과 종결 (0) | 2017.10.11 |
---|---|
임진왜란 7 - 진주성 전투 (0) | 2017.09.04 |
임진왜란 6 - 명량대첩 (0) | 2017.08.31 |
임진왜란 5 - 한산도 대첩 (0) | 2017.08.28 |
임진왜란 4 - 칠천량 해전 (0) | 2017.08.27 |
어린이 동화보다 부족한 개연성을 어떻게든 CG로 덮으려 했으나, 머리를 비우고 봐야 즐거운 영화
'영화 > 한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007 북경특급 (國產凌凌漆, 1994) (0) | 2017.10.12 |
---|---|
인천상륙작전 (2016) (0) | 2017.10.09 |
짧게 적어두기만 합니다.
아웅산 수지는 군부와의 대립 끝에 국민들의 대대적인 지지로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상태입니다만 군부의 권한을 대거 축소시키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즉, 내전 상태가 아닌 현재의 안정적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인 것입니다.
로힝야족은 영국 식민지 시절 앞잡이로서 많은 권한을 누리다가 군부의 쿠데타 이후로 완전히 몰락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군부 입장에서는 과거의 원한 때문에 제거할 명분만 생기면 쓸어버리고 싶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인 것이죠. 그런 시점에서 차별 받던 로힝야족의 반군이 공격을 감행해주니 고마울 수 밖에요. 얼씨구나 하고 민군 할 것 없이 학살을 시작한 겁니다.
이제 아웅산 수지로 넘어가 봅시다. 아웅산 수지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군부를 상대로 국민의 지지를 통해 정치적 승리를 이룬 인물입니다. 피 없이 군부를 무너뜨린 성과를 인정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만 그 승리의 과정에서 군부의 특권을 묵인하는 게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군부의 막무가내식 운영을 눈 감아주면서 국민들의 이권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한계를 처음부터 가지고 정권을 잡았던 셈입니다.
따라서, 특권을 가진 군부가 반군을 제압한다는 명목 하에 민간인까지 학살하고 있지만, 아웅산 수지는 현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과거에 약속했던 대로 군부의 일에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과 국제 여론을 등에 업고 움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섣부른 행동이 군부의 반발을 불러온다면, 애써 찾은 평화가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리겠죠. 나아가 불교를 믿는 대다수의 국민까지도 이슬람을 위해 목소리를 낸 수지에게서 등을 돌려버린다면 정치적 입지는 커녕 본인의 생명조차도 위험해져 버릴 것입니다. 실제로 로힝야족이 한국의 일제 앞잡이들 수준의 미움을 받고 있기에 수지가 로힝야족의 편을 드는 순간 국민들은 아마 등을 돌려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내전의 소용돌이로 미얀마가 휩쓸려 들어가겠죠.
아웅산 수지도 미얀마인이기에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국제 사회의 비난 정도는 참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야 남의 나라 일이니 노벨 평화상이니 인권이니 떠들 수 있지만 자기 나라의 대다수 사람이 불행해지는 일을 꺼리는 것은,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애초부터 당연한 일이니까요.
'정치 > 아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배짱 외교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 (0) | 2017.10.16 |
---|
오늘 소개할 게임은 스팀에서 8,500원에 판매중인 Hero of the Kingdom II 입니다. 장르가 장르여서 그런지 90% 세일도 자주하니 생각이 있으시면 세일할 때 구매하시면 될 듯 하네요.
그렇게 인상적인 게임은 아니었던 지라 스크린샷은 몇 장 없습니다. 우선 메인화면인데 게임 시작버튼에 화살표를 하나 달아준 게 특색이라면 특색입니다.
업적은 게임 진행만 해도 대략 70~80% 정도는 모이게 해둔 것 같습니다. 맵이 열리는 만큼 업적도 자물쇠 모양에서 회색빛깔로 변합니다. 굳이 100%를 모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은 없어서 과감히 엔딩 보고 끝냈습니다.
목소리나 다른 요소들 없이 글자와 약간의 효과음 만으로 내용이나 전투가 전개됩니다. 저는 그래서 그런지 게임을 한다기보다는 어린이용 동화를 읽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상황설명이 꽤나 장황하게 나오는 편인데 단어가 어렵지 않은 편이라, 재밌는 게임이라고 아이들을 속인 뒤 영어공부를 시키는 용도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템 획득도 워낙 단조로운지라 그냥 모든 것이 대사처리로만 이루어집니다. 확실히 동화책에 가까웠던 것 같네요.
플레이타임은 글 읽는 속도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 같고 저는 약 5시간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심심할 때 단편 동화 읽는 느낌으로 접근하기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스파르타에선 왕의 공식 후계자가 될 아이 둘을 제외하고 모든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아고개라고 불리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스파르타인들의 전설적인 영웅왕 리쿠르고스가 남긴 제도였습니다. 교육은 대략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에 나눠서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의 멘토, 멘티처럼 성인 남성 한 명이 여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원로들의 검사를 통과한 아이들인데, 흔히들 떠올리는 산에서 떨어뜨려서 살아남는지 지켜보는... 건 아니고 아기를 대충 보고 체중이랑 혈색이 좋다 싶으면 합격이었습니다. 불합격은 산에서 굶겨서... 살아남으면 통과시켰습니다.
아무튼 훈련이 시작되면 시시티아(Syssitia)라고 불리는 집단 숙소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았으며 집은 가끔 잠이나 자는 곳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생도들은 1년에 한 차례 푀니키스(Phoinikis)라고 불리는 빨간 망토를 하나씩 받았고 그 외의 옷은 일절 금지되었습니다. (영화 300에 나오는 붉은 망토입니다) 침대는 갈대를 맨손으로 뽑아서 직접 엮어 만들었으며 식사는 항상 적게 주고 훔쳐먹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도둑질이 들키면 처벌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이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한 가정집에서 키우던 여우새끼를 훔치려 했다는 이유로 한 학생을 붙잡고 어디에 숨겼는지 말하라고 계속 매질을 했는데 아무리 맞아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포기해서 가라고 하니 소년이 픽 쓰러졌는데 배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망토로 가리고 있던 배를 들춰보니 여우새끼가 소년의 배를 손톱으로 갉아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헬롯(Helot)이라고 불리는 노예민족이 라케다이몬(Lakedaimon, 스파르타 도시 이름) 근처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사람을 죽이는 감각을 익히고 노예들의 반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주기적으로 축제삼아 그들을 학살하는 것도 실습했습니다.
추가로, 약간 우습게 표현해서, 감정도 없는지 학생들이 말 많이 하면 싸다구, 의미 없는 말 해도 싸다구, 농담해도 싸다구를 갈겨서 말을 적게 하는 기계 같이 키웠습니다. 자기 감정을 철저히 숨기도록 했던 것입니다. 덕분에 실제 전쟁에선 겁에 질리지도 않고 굶어도 사기가 떨어지지 않으며 국가를 위해 죽는 걸 기쁘게 여기는 일당백의 군인들이 되었습니다. 스파르타식 교육이나 그들의 전설적인 군대가 아직까지도 명성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분량이 적어서 이 글에 스파르타 여자들에 관해서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여자들도 머리카락을 짧게 깎도록 했습니다. 남자들이 유혹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닌 다른 집 남자들과 잠자리를 갖는 것이 권장되었습니다. 다양한 남자들과의 관계로 더욱 건강한 아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공식적으로 시민 취급을 받지는 못 했기에 아고개에 참여하진 않았습니다만 남자들과 함께 '같은 강도'의 운동을 하기도 하고 자기네들끼리도 알아서 몸을 단련하는 등 이쪽도 강한 걸로 따지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스파르타 남자는 스파르타의 어머니들만 낳을 수 있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스파르타 여자들은 페플로스(Peplos)라는 옷을 입었는데 치파오처럼 양 허벅지가 파여있어서 타국의 그리스인들이 이걸 보고 허벅지 노출녀들이라고 놀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자들 또한 전쟁을 되게 좋아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 설에 따르면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여자들은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머리도 기를 수 있고 옷도 좀 다르게 입어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 > 서양 고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르모필라이 전투 (Battle of Thermopylae) (0) | 2017.12.13 |
---|---|
팔랑크스 (Phalanx) (0) | 2017.11.08 |
사진은 대충 이해를 돕기 위해 선을 몇 가닥 그어둔 것입니다. 조선 북부,남부의 대략적인 이동경로입니다. 빨간색이 임진왜란 시기 왜군, 노란색이 정유재란 시기 왜군, 파란색이 선조의 피난경로, 초록색이 왕비와 왕자의 피난경로입니다.
선봉대가 충주 평야 탄금대에서 신립을 완파하는 동안 후방의 왜군은 전라도로 진출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길도 잘 모르는 왜군이 전라도로 건너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축을 주고 백성들을 매수해 길은 알았겠지만 병사 수가 워낙 많아 좁은 길을 건너다간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니 자연스레 기습을 당한다는 것을 걱정했던 겁니다. 그래서 경상도의 왜군은 아주 기본 중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남해안 해안선을 따라서 서쪽으로 가면 전라도에 도달한다는 기가 막힌 발상을 해냈습니다. 이에 따라 부산에서부터 남쪽길을 따라 서쪽으로 쭈우욱 나아갑니다. 특히, 해귀 이순신의 기반을 제거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습니다.
제가 그림 솜씨가 이렇습니다... 재미로 봐주십시오.
이렇게 나아가다보니 남쪽은 남해와 닿아 있고 나머지 삼면은 해자(방어용으로 만든 인공강)와 강으로 둘러싸인 진주성에 가로막히지만 지상전에는 자신이 있다는 마음으로 공성전을 준비합니다. 다만, 진주성 공성전은 '치열하게 싸웠다.' 정도의 기록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반적인 공성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당시 조선의 성은 크게 2가지로 이루어진 방어구조물이었습니다. 돌이나 흙으로 쌓은 성벽 + 성 주변을 흐르는 강 또는 해자가 그 요소들입니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성을 함락시키려면 공격군이 최소한 수비병력의 3배가 되어야 한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성의 방어력은 강건했습니다.
공성전은 그림에 적어둔 순서로 이루어집니다.
1. 일단 성 주변에 모입니다. - 안전한 곳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먼저 간 아군이 고슴도치가 되는 것을 더 많이 보게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후방의 병사들의 사기가 점점 떨어졌을 겁니다.
2. 해자를 메웁니다. - 주변 흙, 모래 등 적당한 건 뭐라도 자루에 담아서 뛰어와 뿌리는 겁니다. 보통 다른 곳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적의 시선을 돌리고 했지만 상대 장군이 눈치채거나 진주성처럼 사방이 물이면 어쩔 수 없이 죽어가면서 메웠습니다. 혹은 뗏목이나 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수도 있었습니다. 이 방법은 준비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만 병사들의 피해는 적었을 겁니다.
3. 성벽을 오릅니다. - 대표적인 구간입니다. 위에서 던져대는 돌, 부어대는 끓는 물&기름을 오직 방패 하나에 의지해 올라야 합니다. 방패가 있으면 안전해 보일 수도 있지만 화살이 옆에서 날아오면...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손은 사다리를 잡고 있어야 했는데 물과 기름이 사다리를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거기에 사다리를 밀어내기 위한 특수창이 있었는데 다 올라올 때 쯤 밀어서 낙사시켜 버렸습니다.
이 성이란 걸 이용하지 않은 예시가 탄금대 전투이고 잘 쓴 예시는 아래에 서술할 진주성 전투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리메이크 버전이었습니다. 원래 산길에 있던 것을 버리고 평지의 목 좋은 곳에 새로 지은 것이죠. 이는 조금 더 지키기 어렵더라도 더 많은 방향의 길목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북진도 평양을 끝으로 좌절되었고 해귀 이순신한테 셀 수도 없이 많은 병사들이 바다에 묻혀버리고 했던 약 3만 명의 왜군들은 목숨 걸고 몰아칩니다. 그러나 성 안의 관군 3000 + 의병 6000은 그걸 또 목숨 걸고 막아냅니다. 그러자 여태까지 온갖 공성전에서 조선군의 무능한 방어력만 겪어오던 왜군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수일에 걸친 공격이 실패하자 병사들은 의욕을 잃고 집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런 분위기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진주목사 김시민은 밤마다 피리를 불어댔습니다. 본격 조선판 사면초가라 할만하죠 -_-;; 아무튼 죽어라고 무의미한 공격을 반복하던 왜군은 마침내 공성을 포기하고 물러납니다. 개전 이후 최초로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한 전투였고 이순신이 육상에서의 기습에 대한 걱정 없이 왜군을 계속해서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진주목사 김시민은 전투 중 조총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며칠 못 가 사망합니다. 아마 파상풍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평화협상을 하는 동안 내려오는 군대 전체에 진주성만큼은 반드시 박살을 내버리라고 할 정도로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되었고 실제로 거의 10만에 가까운 군대가 일거에 몰아쳐 조선의 백성과 군인을 합쳐 9만 명 가까이를 학살해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심지어는 자기들도 아니다 싶었던 왜군 장수들까지도 성을 비워두면 공성하는 시늉만 하겠다고 했는데, 성 안으로 피신해 온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주둔 중이던 조선군은 왜군을 믿지 못 해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런 보복이 이루어질 정도로 임진왜란 동안 진주성은 전략적인 가치가 굉장히 큰 성이었고 이 곳을 초기에 지킴으로써 사실상 전쟁은 승리로 확정지어졌습니다. 물론, 전제는 이순신이 패배하지 않아야 했던 건 변함이 없습니다.
지도 출처는 구글맵스입니다. 내용은 징비록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역사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진왜란 9 - 정유재란과 종결 (0) | 2017.10.11 |
---|---|
임진왜란 8 - 피란과 명의 개입, 행주대첩 (0) | 2017.10.06 |
임진왜란 6 - 명량대첩 (0) | 2017.08.31 |
임진왜란 5 - 한산도 대첩 (0) | 2017.08.28 |
임진왜란 4 - 칠천량 해전 (0) | 2017.08.27 |
원균이 조선 수군을 싹 증발시키고 나서 실종되자 조정은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집니다. 이에 선조는 국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아이고 이 장군, 내가 미쳤었네... 한 번만 도와주시게' 하면서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막상 복귀하니 배가 한 척도 없었던 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원균의 패전 이후 왜군 밭이 된 온 전라도를 목숨 걸고 돌면서 병사와 무기를 모으는 눈물 겨운 상황에서 마침내 배설이 끌고 온 13척을 인계받습니다. 하지만 배설은 이미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었고, 배멀미니 몸살이니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덜컥 탈영해 버립니다. 사실 거의 150척이 하룻밤 사이 싸그리 증발했는데 싸우러 나가는 게 두렵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일 겁니다.
그 덕인지 왜군의 자신감은 하늘을 뚫을 듯 올라가 있었는데 정찰대가 조선 수군을 겁내지 않고 쫓아오는가 하면 (이순신이 이에 분노해 못 따라갈 때까지 쫓아갔던 게 함정이긴 합니다) '어? 님들 13척이네요 ㅋㅋㅋㅋ 한 판 붙어보실래요?' 하면서 똑같은 13척으로 덤비기도 했습니다. (웃긴 건 이번에도 이순신은 화나서 쫓아가고 왜군은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적을 2번 격퇴해도 이순신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 수군의 사기는 땅바닥을 기어다니고 왜군은 자기 앞바다처럼 돌아다녔습니다. 오죽했으면 조정에서도 선박 13척 모두 불질러 버리고 수군은 육군으로 재편성하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 때 그 유명한 이순신의 명언이 나옵니다.
- 신에게는 아직 13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힘써 싸운다면 적들도 감히 바다를 넘보지 못 할 것입니다. -
하지만 왜군도 그 놈의 귀신같은 이순신한테 하도 당한 게 많아서인지 작정하고 쓸어버리려 합니다. 133~300척 규모의 대함대를 이끌고 이순신을 찾아 서해를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참고로 현대 대한민국 해군의 전투함을 모두 합해도 약 150척이니 바다를 꽉 메운 적선이란 표현이 크게 과장도 아니었을 듯 합니다. 이순신은 숫적 열세 때문에 넓은 바다에서 싸우는 건 무리라고 판단, 한반도 남서쪽 끝의 진도 앞의 물살이 거센 '울돌목'을 전장으로 삼고 적들을 마주합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사기가 너무 떨어져 있던 터라 모든 리스크를 다 떠 안고 가장 앞장 서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장군이 죽으면 와해되어 버리는 군대의 특성을 생각해 봤을 때 모 아니면 도의 명운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물론, 평소에도 전투에 직접 참가하셨습니다만 이번처럼 제일 앞에 있게 되면 포와 총의 집중 사격을 받아내야만 해서 배로 위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도 조선을 버리려는 것인지 때마침 물살도 그림의 초록색 화살표처럼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침 해가 뜨고 나서 왜군이 자신만만하게 몰려들어오기 시작했고 명량대첩이 시작됩니다. 이순신은 오자병법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격려사를 합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한 명이 길목을 막고 버티어 서면 천 명이 어찌 떨지 않겠느냐?-
부끄럽게도 조선군의 나머지 12척은 수평선 근처까지 멀리 떨어져서
강건너 불구경을 하고 대장선 1척 vs 133척의, 삼국지의 장판파를 해상에서 재현한 전투로써 시작됩니다. 당시 빠른 물살이 의외의 호재로 작용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수많은 배가 좁은 해협의 감당할 수 없는 물살에 휘말리면서 통제력을 상실하고 대장선을 향해 무차별 돌진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울돌목의 유속이 12노트 정도 되는데 카누의 평균 속력이 2~3노트입니다. 조선 노잡이들이 어떻게 버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좁은 해협을 끝까지 사수하고 있었습니다.
전투양상으로 넘어가면, 기본적으로 판옥선이 너무 높아서 일본군은 가져온 갈고리 혹은 판옥선의 튀어나온 틈을 활용해서 기어올라가 싸워야 했는데 조선군이 잡히는 거 다 휘두르고 (승자총통은 초기 형태의 화승총이었는데 이 물건이 휘어진 상태로 발굴되고 있을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을 겁니다) 던지는 걸 받아내며 올라가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세키부네끼리 부딪혀서 엉키고 판옥선을 기어올라가는 동안 날아오는 투사체에 맞아 죽고, 똘똘 뭉쳐 있는 함대에는 빚나갈 걱정 없이 장전되는 족족 포탄 날아오지, 비격진천뢰 날아오지... 어떻게 생각해보면 일본군도 참 불쌍할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한 척이 서서 버티고 수백척 + 매우 빠른 유속으로 미는데도 버티는 이순신은 왜군 입장에서 살아있는 악몽 그 자체였을 겁니다.
복원된 판옥선
그래도 단 한 척, 판옥선 단 한 척으로 어쩔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북치고 징치고 깃발 흔들어대면서 현령 안위를 불러들입니다.
-안위야! 싸우다 죽고 싶으냐! 아니면 네가 도망친다 하여 군법에 죽지 않을 것 같으냐?-
호통을 들은 안위의 함선은 적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갑니다만, 곧 적선에 둘러쌓여 위기에 처합니다. 기록상 전투 중 유일하게 적의 상륙을 허용했는데 (다시 말해 이순신의 배에는 한 명도 못 올라갔습니다) 정황상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대장의 배 옆으로 와서 함께 막는 게 아니라 정면 돌파를 감행해 한가운데로 들어간 듯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긴박한 와중에 이순신은 판옥선으로 세 척을 연달아 완파해서 안위를 구해냅니다. 안위에게 일갈을 날린 직후 호위를 맡기로 되어 있었던 김응함에게도 외칩니다.
-중군(호위장군)이 대장을 지키지 않으니 죄를 면할 길이 없다. 하지만 전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호통을 들으니 김응함도 용기백배하여 전진합니다. 그리고 하늘이 웃음지으시려는 건지 물살이 정반대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조선판 장판파에 이어 제갈공명의 신기까지 부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래그림과 같은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 중입니다.
돌파하기는 커녕 점점 아군이 위기에 몰리는 상황에서 왜적은 결국 오후에 달아나기 시작하였으나 함선소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안 그래도 어려운 회전이 잔뜩 뭉쳐 있는 바람에 더 어려워지고 주변이 온통 섬이라 빠져나가긴 커녕 여기저기 섬에 갔다박아버립니다. 종국에는 말 그대로 잔디깎이처럼 크고 무거운 판옥선 12척에 잡초마냥 쓸려나갑니다.
양측의 기록을 종합하면 일본군은 약 절반의 군사가 전사했고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자신의 안택선(판옥선만큼 덩치가 큰 장군선입니다)과 함께 바다로 가라앉았고, 마다시라는 놈은 죽어서 바다에 둥둥 떠다녔는데 항복한 왜인 준사에 의해서 신원이 밝혀지는 바람에 뱃머리 여신상 마냥 토막나서 판옥선에 전시되었으며장수들이 대부분 중상을 입었고 이순신의 역사적인 패전을 기록하라고 보냈던 모리 다카마사라는 놈은 전투 중 물에 빠졌고 급하게 구조되어 탈출했다고 합니다. 조선은 대개 판옥선이 앞장서고 뒤에 보조선들이 배치된 반면에 왜군은 세키부네가 앞장 서고 안택선이나 특별한 배들이 후방에 배치되었음을 고려하면 처참해도 너무나 처참하게 전방부터 후방까지 모조리 박살났던 것입니다. 한 편, 이 와중에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끝까지 PTSD 증세를 보이며 후방에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명량 대첩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배의 보수와 병사들의 치료, 물자 보급 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후퇴하고 왜군은 명목상 승리를 거두어 꿈에도 염원하던 서해에 진입합니다만... 트라우마 수준으로 이순신에 대한 공포감에 벌벌 떨게 됩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전투도 못 한 채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수군은 말이 수군이지 병사수송선 수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영화 명량에 나왔던 판자나 사다리를 걸치고 달려올라가는 건 고증오류인데 그런 무거운 걸 실을 무게도 아쉽고 (속도가 줄어듭니다) 실어도 판옥선이 너무 높아서 의미가 없기에 애초에 세키부네에는 갈고리만 싣고 다녔습니다.
육지에서는 한창 한양을 향해 진군 중이던 왜군이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듣고는 넋이 나가서 보급로를 찾아 후퇴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도 의심병 말기 환자가 되어버린 선조는 이순신의 공을 깎아내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대장군이 '조선의 왕아. 내가 지금 맘 같아서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축하하고 싶은데 전황이 급해서 못 가는 거니까 헛소리 하지말고 벼슬 올려주게' 라고 훈계하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승진시킵니다. 현령 안위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김억추를 대신해 전라우수사의 자리로 파격승진하게 됩니다.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7급 공무원을 3급으로 파격승진시킨 것 쯤 될 겁니다.
이후 원균의 손에 흩어졌던 수군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어찌저찌 살아남은 판옥선들이 합류하는 데다 진린의 명 수군까지 합류하며 안 그래도 무서운 이순신의 손에 다시 한 번 위력적인 함대가 쥐어집니다. 이에 더해 지상의 조선군과 명군도 사기충천하여 점점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결국 과거의 격언과는 달리, 한 사람의 명장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역사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진왜란 8 - 피란과 명의 개입, 행주대첩 (0) | 2017.10.06 |
---|---|
임진왜란 7 - 진주성 전투 (0) | 2017.09.04 |
임진왜란 5 - 한산도 대첩 (0) | 2017.08.28 |
임진왜란 4 - 칠천량 해전 (0) | 2017.08.27 |
임진왜란 3 - 이순신의 출격과 왜군의 약탈 (0) | 2017.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