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양 고대 2017. 12. 13. 17:27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아마 많은 분들이 전투가 일어난 테르모필라이보다는 영화 300으로 더 잘 알고 계실 전투입니다.


이 전투가 일어나기 약 15년 전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홧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1세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내부(중앙집권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땅이 너무 넓어서 심심하면 터졌습니다)의 반란을 정리하고 그리스 놈들한테 복수하려고 이를 바득바득 갑니다. 그래서 본토에 대한 경고장 느낌으로 소아시아 (오늘의 터키) 서해안의 그리스 식민지들을 모조리 쓸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리스 전역의 각국에 사절을 보냅니다. 이것이 유명한 '물과 흙을 바치면 평화롭게 공존할 것이다.' 라는 문구입니다. 문명의 최전선이라 불리던 마케도니아마저 굴복시킨 페르시아의 이 요구는 절반 이상의 그리스 도시들에 의해 받아들여집니다. 마라톤 전투 이후로 그리스 주도국으로 군림하던 아테네는 완전히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도 항복하자니 체면이 안 서고 저 놈 저거 또 오면 막아낼 자신은 없거든요. 이렇게 고민하던 그 때, 스파르타에서 멋있는 행동을 선수 쳐버립니다. 사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을 뎅강하고 잘라버린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신을 죽이는 건 극도로 무례한 행위라 그냥 '뜨자'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테네도 덩달아 사신을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기타 힘 좀 있다 싶은 도시들도 주도권을 잡을 마지막 찬스라는 생각에 사신을 그냥 보냅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사신들로부터 소식을 듣고 살생부를 작성합니다. 특히, 스파르타는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남기고 모조리 죽이고 노예로 팔아주겠다고 단단히 벼르죠. 이렇게 서방 역사상 첫 백만대군이 출발합니다. (실제로는 30~60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당시엔 보스포루스 다리가 없어서 해협을 배로 건너야 했는데, 통 큰 크세르크세스는 배를 연결해서 물에 뜨는 다리를 제작합니다. 그리고는 해안선을 따라서 아테네를 향해 직진하죠. 그렇게 페르시아 -> 마케도니아 -> 항복한 그리스국가들을 거쳐 남부로 들어가는 길목인 테르모필라이에 진입하게 됩니다. (해군도 보급을 위해 해안선을 따라서 함께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곳에서 그리스군과 조우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를 필두로 약 7천명의 그리스인이 모인 이 연합군은 '여기 뚫리면 끝장이다.'라는 생각 하나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검은색 빗금은 대략적인 오늘날 간척지를 표시해둔 것인데, 당시에 정확히 어느 정도 너비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원지도 출처 : Google Maps)


실제로 지도에 나와있듯이 길목이 매우 좁았고 바로 옆에 섬이 하나 있어서 바닷길도 상당히 좁았습니다. (옛날엔 나침반, 정교한 지도 같은 게 없어서 현대 지도로 짧고 뭐고 간에 주변에 땅 안 보이기 시작하면 선원들이 겁에 질렸습니다 그러다보니 땅 근처에서 항해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300명이 보내진 걸로 알려졌는데 왕실 근위대의 수와 일치하고, 이는 몰살을 각오하고 레오니다스와 근위대만 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병력을 다 내보냈다가는 노예 민족인 헬롯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싸움부분에 들어가기 전에 짧게 고대 전쟁을 설명하자면, 당시는 머릿수로 밀어붙여서 적이 도망치면 이기는 게 전쟁이었습니다. 다만 그리스와 페르시아 군인의 차이점은 // 그리스는 돈 좀 있는 '시민'이 자기 돈으로 장비 왕창 사서 훈련도 빵빵하게 받은 뒤에 팔랑크스라고 불리는 방패와 방패를 맞닿고 가만히 서서 앞으로 걸어나가는 전술을 취했고 // 페르시아는 나라에서 농민들을 왕창 모아다가 창 한 자루 씩만 쥐어주고 방패나 갑옷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기에 나뭇가지를 엮은 방패와 평소 입던 옷을 챙겨서 전장에 우루루 몰려나갔습니다. 다시 말해, 질 vs 양의 대결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그리스 창에는 페르시아 방패와 갑옷이 다 뚫리고 페르시아 창,화살에는 그리스 방패는 커녕 갑옷의 얇은 부분도 안 뚫려서 전투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안 그래도 방패의 벽, 팔랑크스에 막혀서 찌를 만한 데도 별로 없는데 틈새 부분은 죄다 갑옷으로 덮여있으니 속수무책이었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모탈이라고 불리던 중보병도 투입했는데, 영화처럼 얼굴에서 입김 뿜고 그런 부대였으면 혹시 몰랐겠지만 아니었기에 이들의 장비로도 감당이 안 됐습니다.렇게 장비와 훈련으로 다져진 그리스 군은 이틀 간은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바다에서는 오히려 당시 아테네가 바다의 왕자라 다 이기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3일 째에 에피알테스라는 배신자가 (이 인간 하나 때문에 집안 전체가 그리스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배신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큰 돈을 받고 비밀 통로를 알려줍니다. 이 쪽으로 2만 명의 별동대가 오니까 (이틀간 죽어나갔는데도 별동대 숫자가 그리스군보다 3배 많은 건 넘어갑시다) 여길 지키던 소수의 그리스군이 숫자에 기겁해서 도망쳐 옵니다. 총사령관 레오니다스는 회의를 열고 일부가 시간을 끄는 동안 나머지 군대는 후퇴해서 정비하자는 안을 냅니다. (지금 모인 병력이 대부분의 정규병력이라 여기서 잃을 수 없었습니다)



(출처 : Pinterest)


회의 후, 스파르타300, 테스피아700, 테베400인 만이 남아서 페르시아의 발목을 붙들고 마지막까지 싸웁니다. 하지만 위의 사진에 나와있듯이 팔랑크스는 오직 정면의 적과 싸우는 데에 특화되어 있어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페르시아 군 손에 하나 둘씩 죽어나갑니다. 전투가 한창일 때 레오니다스는 결국 전사했으나 스파르타인들이 '왕을 지켜라' 라고 일제히 외치면서 그 절망적인 와중에 시체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날이 가기 전에 1400명은 전멸했고 페르시아는 계속해서 남하합니다. 영화나 현실이나 엄청나게 극적이고 멋있지만, 실제론 3일 만에 방어선이 뚫려버렸으니 페르시아가 병력 피해를 조금 더 봤을 뿐 그리스의 대패였습니다.

 

하지만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을 걸 알면서 싸우러 나간다는 이 행위는 이후 2500년간 전세계 사람들의, 농담삼아 국뽕용 향신료로 쓰여왔고 아직도 스파르타의 전사들을 역사상 가장 용맹한 군인 가운데 하나로 기억하게 했습니다. 비록 패배했을지라도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이 때 아테네는 패배 소식을 듣고, 도시를 비우고 펠로폰네소스로 시민들을 대피시키는데 페르시아군이 아주 신나게 잘 약탈했습니다.


여담으로 사실 일부가 테르모필라이에서 살아남긴 했으며 스파르타인도 3명이 살아남았습니다. 에우리투스, 아리스토데무스, 판티테스가 그들의 이름입니다. 그 중 에우리투스와 아리스토데무스는 전투 전에 눈병에 걸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후방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에우리투스는 고집을 부려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데무스는 평생을 겁쟁이라고 국민 전체에게 멸시를 당했으며, 전장에서 싸우다 죽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합니다.


판티테스는 레오니다스의 명으로 잠시 테살리에 파발로 갔다가 제 시간에 전장에 돌아가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판티테스도 겁쟁이라고 멸시했으며 그는 목 매달아 자살했다고 합니다. 슬픈 의미에서는 결국 300명이 모조리 죽은 것이 맞는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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