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592년 7월 초, 기세 좋게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던 육군과 달리 왜 수군은 몇 차례 연속된 수전에서의 패배로 어느 정도 위축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당시 왜군은 봉건국가였기에 각각의 영주가 자신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비교적 자유롭게 공세를 가하는 기본 전략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승리가 반복되는 지상전에서는 순조로웠던 반면 싸웠다 하면 기반이 다 날아가 버리는 수전에서는 감히 싸우기가 두려울 정도로 전력차가 압도적이었습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던 왜군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십수척 규모의 소영주 단위가 아닌 사령관의 지휘 하의 수십척 규모 함대를 운용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정규 함대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산도 인근의 견내량 (지금의 거제도) 인근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일본 함대가 정박하면서 한산도 대첩의 서막이 시작합니다.
파란색은 조선 수군, 빨간색은 일본 수군을 나타냅니다
당시 인근의 일본 수군은 크게 세 명의 사령관의 지휘 하에 나뉘어져 있었는데 가토, 구키, 와키자카가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함대를 모두 합하면 200~300척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어마어마한 데 비해 조선 수군은 판옥선 52척과 거북선 3척이 전부였습니다. 그 규모에 의한 확신이었는지 아니면 육상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인한 기세가 아직 남아있었던 것인지 와키자카는 상당히 자신에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웅크리기만 하는 다른 일본군과는 달리 이순신이 대여섯척의 판옥선으로 미끼를 던지니, 덥석 물어 견내량을 지나 한산도에 매복 중이던 조선 수군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배는 그 어마어마한 무게를 사람이 노를 저어 움직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물론 순풍이면 바람을 타고 가면 됩니다) 도망치는 적을 쫓기 위해서 거의 25KM를 전속력으로 항해하는 동안 사공들이 이미 지치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 상태로 위의 그림처럼 빠른 물살을 타고 견내량을 지나자, 섬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판옥선과 도주하던 판옥선이 전열을 가다듬고 전열이 무너진 채 뭉쳐있는 일본군을 학의 날개모양으로 포위해버립니다.
사족이지만 이는 적은 수로 다수를 포위한 역사상 첫번째 해전이며 지금까지도 사례가 몇 되지 않는 해군을 이용한 매복 작전으로, 전쟁사적인 가치가 어마어마합니다.
포위는 윗 그림의 형태가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는데 전 다른 여러가지 주장에 제 나름의 생각을 더해 아랫 그림 형태로 완성될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근거는 물살의 방향 (녹색 화살표) + 설계상 180˚ 회전이 힘든 세키부네로, 왜군이 비어있는 북쪽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다가 결정적으로 와키자카와 휘하의 장병들이 상륙한 섬이 그림의 오른쪽에 나와있는 한산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뜩이나 적은 수로 다수를 감싸야 하는 상황에서 파도와 암초는 아군도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굳이 섬 앞에 전선을 배치해서 포위를 했을까 싶습니다. 다만, 어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산도가 무인도였기에 먹을 것이 없으니, 왜적이 상륙해도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게 만드는 것을 노렸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대로의 포위진을 상상해 보시는 것도 즐겁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포위 이후 왜군은 한 방향으로 뚫어보려 시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이미 전열이 무너져서 질서정연하게 한 방향으로 가는 건 가능할 리가 없었고 서로 부딪혀 침몰하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해류와 포위진으로 인해 그물망에 걸린 물고기처럼 한 점에 수백척이 뭉쳐있는데 그 곳에 대고 포탄과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집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왜군 한가운데엔 불 뿜는 용머리 선박이 3척이나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헤집고 다닙니다. 마침내 사기가 바닥난 왜군의 아비규환 속에 전투가 끝났습니다. 단 4척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완파 또는 나포되었고 와키자카는 한산도에서 미역만 13일 동안 먹다가 구조되고 일부 장수는 할복하는 등, 왜군의 생지옥으로 한산도에서의 전투는 종결되었습니다. 반면 조선군은 3명 전사에 10명 부상, 전선 모두 무사라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의하실 부분은 일본군의 피해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 자료마다 편차가 큰 편인데 저는 최악의 피해를 기준으로 작성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조선의 배꼬리만 보여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다니게 되었고 3번글에 썼듯이 어떤 경우든 요새에만 틀어박혀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노에 가득차서 길길이 날뛰고, 왜장들은 살기 위해 김응서를 포섭해 원균이 군권을 잡아 칠천량의 악몽을 일으키게 만들었으며, 굶주린 왜군들이 더더욱 혈안이 되어 조선 국토를 되는 대로 약탈하고 다니게 만들었으니 이는 너무 말도 안 되는 승리의 안타까운 부작용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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